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국가기관이 피자 조각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8면

그러나 상황이 복잡하고 벼랑끝일수록 정도(正道)로 가야 한다. 역사적 전통과 주요 기능에서 김 의원이 제안한 7개 기관은 모두 수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법원은 행정부·국회와 함께 3권 분립의 중요한 축이다. 그리고 사법부의 수뇌로 검찰·변호사와 함께 법조 3륜(輪)을 구성한다. 헌재는 헌법과 인권을 보호하고 국가적 논란을 정리하는 최상급 심판관이다. 감사원은 대통령의 직속기관으로 주로 중앙부처·공기업의 회계와 공직자 비리를 감시한다. 공정거래위의 핵심 업무는 대기업의 불공정행위를 통제하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와 국민권익위는 업무상 정부부처와 긴밀한 접촉권 내에 있다.

이런 기관들을 수도에서 들어내 멀리 이식(移植)할 때는 절박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도통 이유가 보이질 않는다. 수정안은 이미 ‘교육과학중심 경제도시’라는 커다란 경제권을 설계하고 있다. 그런 곳에 공무원 수 천명이 내려간다고 소득증대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그리고 소득에 도움이 되면 비효율과 부작용은 팽개치고 내려가야 하나. 이전(移轉) 옹호론자들은 이들 기관이 독립적이어서 ‘행정부처 비효율’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이들 기관의 특성과 기능을 헤아리지 않은 것이다. 절박한 이유가 보이질 않으니 결국 편의주의적 발상 아닌가. 원안 고수론자들이 입장을 바꿀 수 있도록 적당한 핑계거리를 주자는 것 아니겠는가.

원래 세종시 자체가 편의주의적 결과물이다. 수도 이전이 위헌결정을 받았으니 총리실과 9부라도 옮겨 충청의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편의(便宜)’ 때문에 국가가 지금 이 혼란을 겪고 있는데 다시 편의로 문제를 덮으려 하나. 편의를 위해서라면 국가기관을 마음대로 옮겨도 되나. 국가기관이 너 한 조각 나 한 조각 나눠먹는 피자 조각인가. 세탁기 팔 때 끼워주는 하이타이인가.

김무성 절충안을 계기로 세종시 토론이 활성화되는 건 바람직하다. 그러나 토론은 어디까지나 편의가 아니라 본질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Conclave)처럼 며칠이건 문을 걸어 잠그고 국가의 미래를 토론하라. 그런 다음에 모든 이는 국회 본회의장에 모여야 한다. 세종시 수정안은 기본적으로 세종시법을 고치는 것이다. 법 개정을 국민투표라는 편법에 부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책투표이므로 무기명 비밀투표로 해서도 안 된다. 모든 법률안 투표가 그러하듯 당당하게 공개투표를 해야 한다. 그래서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만약 원안이 고수되면 행정부처는 2013년부터 이전하게 된다. 다음 대통령 때부터다. 원안고수론자의 주장처럼 총리실과 9부2처2청을 옮겨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행정 비효율이 눈덩이처럼 불어 국가 경쟁력에 위기가 닥치면 그것은 한국인에게 처절한 역사적 교훈이 될 것이다. 독일처럼 한국에서도 5년이나 10년 후 다시 서울로 합쳐야 한다는 논의가 나올지 모른다. 그 경우 거대한 혼란, 막대한 비용, 그리고 심대한 자괴감이 한국인을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 한국이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니겠는가. 안타깝지만 그것이 국가의 운명이라면 어쩌겠는가.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