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통큰 소비자·좀스런 소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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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무슨 귀한 유산인양 몇십년 전의 작태를 되풀이하고 있는 정치판을 보노라면 새해라는 단어를 쓰기도 멋쩍다.

그래도 이웃나라 일본에서 신년 벽두에 일어난 조그만 일 하나로 얘기를 시작하자.

지난 2일 요코하마(橫濱)와 가와사키(川崎) 두 곳에 있는 오카다야(岡田屋)모아즈 백화점. 21세기 첫 영업일 아침부터 고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들은 핸드백이나 주머니 속에서 유인물 한장씩을 꺼내들고 있었다. 직원들의 안내로 고객들은 자그마한 선물 하나씩을 받고 되돌아갔다.

고객들이 가져온 유인물은 꼭 10년 전 백화점측이 돌린 광고전단이었다. 여기엔 2001년 첫 영업일에 이걸 가져오면 선물을 주겠다는 약속이 적혀 있었다. 1천2백여명의 고객들이 이날 백화점을 다녀갔다. 접시시계 하나를 받기 위해.

광고전단을 받아 10년을 간직하는 고객들의 정성과 10년 전 약속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일본 백화점 얘기를 들으면서 한국의 소비자와 백화점들이 생각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통 크고 성급한 우리 소비자들이 10년 뒤를 운운한 광고전단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 "누굴 놀리느냐?" 고 할 것 같다.

백화점들은 화끈하게 아파트 한채나 벤츠 승용차를 경품으로 내걸지언정 먼 장래를 내다보는 마케팅전략 같은 것은 없지 않나 싶다.

어떤 돌연변이 백화점이 나타나 그런 약속을 했다 하더라도 전단을 들고 찾아온 고객에게 혹 이런 핀잔을 주지 않았을까. "이런 걸 10년이나 보관해 왔어요?"

씁쓸하긴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우리네 자화상이다. 그렇다. 우린 너무 통이 커서 문제다. 규정이나 분수를 생각하면 작게 벌일 일인데 "사람이 좀스럽게 그게 뭐야" 라는 소리만 들으면, 아니 들을까봐 정도 이상으로 일을 벌인다. "그 사람, 통이 보통 큰 게 아니야" 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안달한다.

그러다 보니 탈이 난다. 대표적인 예가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의 세계경영이다. 그 큰 그룹이 결국 도산해 계열사를 팔려고 보니 하나도 쓸 만한 게 없었다.

국민세금과 같은 공적자금으로 연명하던 대우자동차도 몇달 전 부도를 내고 지금은 미국 제너럴모터스(GM)에 "제발 좀 인수해달라" 고 목을 매고 있는 형국이다.

작은 일에도 몸이 움직이고 마음이 감동해야 사회가 튼튼해진다. 예금을 하기 위해 금융기관을 선택하는 경우를 보자. 아직도 우리는 주변의 친지가 권유하는 곳이나 전자금융 시대인 데도 집이나 사무실에서 가까운 은행을 택하곤 한다. 금리는 여전히 큰 변수가 못된다. 연간 1%포인트 정도의 금리차는 우습게 여긴다. 미국과 같은 금융 선진국에선 0.1%포인트 단위로 돈이 움직인다.

소비자가 예민하게 반응해야 기업이 강해지고 나라의 경쟁력도 생긴다. 미국의 '경제대통령' 으로 불리는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시장에 팍팍 먹히는 것도 똑똑하고 예민한 소비자들이 많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느 제품에 흠집이 있으면 그 회사에 전화를 걸어 소비자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 아무 반응이 없으면 소비자가, 국민이 무시당한다.

새해부턴 예컨대 광고전단 같이 작은 것도 챙겨보자. 그래야 큰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우리도 이젠 좀 좀스러워지자.

심상복 국제경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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