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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38) 한강 남쪽 방어선 지연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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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미국 최대의 박물관 운영 단체인 스미스소니언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스미스소니언’의 2003년 7월 호표지. 6·25 휴전 50주년을 맞아 특집기사를 내면서 표지에 당시 사진을 실었다. 후방으로 피신하는 피란민과 전선으로 떠나는 군인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길을 가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임진강 전선에서 밀린 나는 1950년 6월 29일 먼동이 트는 무렵 시흥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 낯설지 않은 미군 장교가 서 있었다. 전쟁 전 광주의 5사단장을 맡고 있을 때 미 고문단장을 따라 함께 왔었던 메이 중위였다.

그는 전 단락에서도 자주 언급했던 인물이다. 내가 50년 12월 평안도에서 중공군 공세에 밀려 후퇴하면서 말라리아에 걸려 심한 오한에 떨고 있을 때 조그만 버너와 코펠을 가지고 와 커피를 끓여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를 시흥역 플랫폼에서 만난 것이었다.

나흘 동안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나는 염치 불고하고 그에게 “설탕이 있으면 좀 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어디선가 설탕을 구해 와 건네줬다. 탈진하다시피 했던 나는 일행과 함께 그 설탕을 물에 타서 마셨다. 조금 기운이 생겨나면서 정신도 들었다.

나는 미군이 언제 본격적으로 개입하는지를 물었다. 그런 나에게 메이 중위는 “곧 VIP가 도착할 것”이라고 귀띔을 했다. 그 VIP가 누군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 후에 미군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봤다. 먼지가 풀풀 날리고 있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고위 장성이 지나가는 듯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행렬이었다. 미군 호위 병력이 지키는 가운데 맥아더 장군은 영등포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국 전선을 직접 살피기 위해서였다.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을 예고하는 행렬이었다. 마음이 한결 든든해졌다.

우리 일행은 어느 건물에 들어가 잠시 눈을 붙였다. 나흘 동안의 피로가 몰려 있던 상황이어서 두어 시간을 잤는데도 상태는 한결 나아졌다. 시흥보병학교에 차려진 김홍일 장군의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찾아갔다. 이틀 전 봉일천 전방 지휘소를 방문했던 김 장군은 나를 보자 얼싸안으면서 반가워했다. 1사단 상황을 묻는 김 장군에게 “병력을 수습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김 장군은 내게 “지금 당장 김포 쪽 상황이 급하니 그리로 나가서 전투를 지휘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곰곰이 생각했다. 전선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나는 부하들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싸우다가 안 되면 마지막에는 지리산에서 게릴라가 돼 적에게 끝까지 덤비자”고 했던 봉일천 마지막 회의에서의 약속이었다. 나는 “그 임무는 사양하고 싶다. 나중에 제 몫을 제대로 하겠으니 지켜봐 달라”며 간곡하게 사양했다. 김 장군은 내 말을 선뜻 받아줬다. 그는 지혜와 함께 덕을 겸비한 지휘관이었다.

나는 김 장군의 배려로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개전 이후 처음으로 입은 전투복이었다. 6월 25일 아침 정신 없이 집에서 뛰어나올 때 입었던 카키색 정복을 그때까지 입고 있었다. 이미 여기저기 해어져 있었다. 국방색 전투복으로 갈아입으니 기분이 산뜻했다. 나는 1사단 재편 작업을 서둘렀다. 그러나 대포 등을 비롯한 중화기는 대부분 임진강 전선에 버려두고 밀려 와 있던 상황이었다.

이튿날인가 나는 영등포 부근의 한강 남쪽 방어선을 둘러봤다. 국군이 한강 둑에서 장갑차를 사용해 서울 쪽으로 사격을 하고 있었다. 지휘관은 잘 알고 지내던 기갑연대장 유흥수 대령이었다. 반가운 나머지 내가 소리를 질렀다. “흥수야, 내가 왔어!” 유 대령도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보더니 “아이고, 형님 오셨군요”라면서 나를 얼싸안았다. 회포를 풀 사이도 없었다. 전쟁 직전 수도방위사령관으로 발령받은 이용문 장군(작고)이 서울을 빼앗긴 뒤 목숨을 걸고 항전에 나서고 있다는 얘기도 들어 마음 한편으로 위안도 생겼다. 그러나 모든 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한 국군은 한강 남안에서 최대한 지연작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유 대령에게 꺼내기 힘든 부탁을 했다. “흥수야, 내가 지금 부대 병력을 수습하고 있는데, 지프가 없어서 기동이 어렵다. 미안하지만 지프 한 대 내줄 수 있느냐”고 했다. 유 대령은 선뜻 “그럼 내 지프 타세요”라면서 자신의 차를 줬다.

타고 다닐 차량도 없어 구걸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 지프는 참 요긴했다. 시흥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나를 먼저 알아보고 다가오는 병사들도 있었고, 내가 후퇴하는 한 무리의 병력에 다가가 “1사단 장병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사선(死線)에서 돌아온 전우들이었다. 너무 반가웠다. 그 덕분에 500~600명 정도의 장병이 다시 모였다. 대부분 개인화기는 지니고 있었고, 간혹 그마저 잃은 병사들도 눈에 띄었다.

사단장으로서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말이 사단이었지 부대 건제(建制)도 다 흐트러진, 그야말로 풍비박산의 1사단. 과연 이 상태에서 언제 다시 부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저 야수같이 밀려오는 북한군의 공세를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을까. 황량한 광야에 벌거벗은 채 나 홀로 서 있는 심정이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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