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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포퓰리즘, 좋은 포퓰리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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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최근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단어의 경우도 그렇다. 지난 1월의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신포퓰리즘’이 등장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포퓰리즘은 세종시 논란에도 등장했고 그리스 경제위기의 주범으로도 몰렸다.

포퓰리즘은 국어사전에는 인민주의(人民主義)로 나와 있지만 인기영합주의나 대중영합주의로 흔히 번역된다. 포퓰리즘은 ‘보통 사람(ordinary people)의 이익과 의사를 대표하기 위한 정치 사상이나 활동’이다. ‘편가르기’ 자체는 정치의 본질이지만 포퓰리즘은 엘리트 대(對) 보통사람·서민의 대결 구도를 만든다. 그래서 포퓰리즘의 반대말은 엘리트주의(elitism)다.

일반적으로 포퓰리즘은 좋은 인상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라틴아메리카 포퓰리즘이 주로 알려졌다. 선진국 문턱에 도달한 나라를 주저앉게 하는 게 바로 포퓰리즘으로 알려졌다. 포퓰리즘은 다른 정치 이념·운동과 ‘나쁜’ 결합을 하기도 한다. 포퓰리즘 운동은 파시즘의 토양이 되었으며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상징하듯 21세기 라틴아메리카 포퓰리즘은 사회주의와 결합하고 있다.

미국의 포퓰리즘은 1890년대 미국 인민당(Populist Party)의 활동에서 유래한다. 일반적인 인식은 긍정적이지 않다. 상대편에 낙인을 찍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미국 사학계의 포퓰리즘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포퓰리즘 운동의 주장이 황당한 것이 아니었으며, 훗날 정부가 이를 채택한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다.

최근 미국에서 다시 포퓰리즘 논란이 불붙고 있다. 두 가지 계기가 있다. 지난달 19일 매사추세츠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은 57년 아성인 매사추세츠를 공화당에 빼앗겼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기득권과 싸우겠다”는 말을 빈번히 썼다. 지지자 이탈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다. 일부 지지자들이 오바마에게 포퓰리즘을 요구하고 있지만 오바마는 아직 본격적인 포퓰리즘 행보에 나서고 있지는 않다. 한편 6일에는 지난 대선 때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이 포퓰리즘적인 수사를 쏟아냈다.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티파티(Tea Party)라는 포퓰리스트·보수주의 단체 총회에서다.

그런데 미국 정치에서 포퓰리즘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 양당 모두 1930년대 이후 포퓰리즘을 구사해 왔다. 지난 40년간은 공화당에 포퓰리즘 성향이 강했다. 공화당은 ‘큰 정부’에 대한 반감, 민주당은 ‘큰 기업’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포퓰리즘적 언행의 땔감으로 삼았다. ‘좋은’ 혹은 ‘그리 나쁘지 않은’ 포퓰리즘이 미국 정치의 윤활유로 기능했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에서도 “내가 하면 국민·서민을 위한 정책이요 남이 하면 포퓰리즘”이었다. 지금 미국 유권자들은 분노하고 있다. 정파에 따라 대기업 혹은 비대한 정부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모두 싸잡아 미워하는 유권자층이 증가하고 있다. 분노를 먹고 포퓰리즘이 자라고 있다.

앞으로가 문제다. 일부 성미 급한 논객들은 금융위기 이후에 ‘신(新)포퓰리즘’ 시대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차원에서 도래했다고 진단한다. 신포퓰리즘은 ‘좋은 포퓰리즘’일까 ‘나쁜 포퓰리즘’일까.

판단의 기준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얻을 수 있다. 분류의 천재였던 그는 정치체제를 ‘지배자의 수’와 ‘공익(公益)·사익(私益)’이라는 잣대로 나눴다. 그는 1인·공익이 지배하는 군주정, 소수·공익이 지배하는 귀족정, 다수·공익이 지배하는 입헌정이 사익으로 왜곡되면 폭군정·과두정·민주정이라는 나쁜 체제로 바뀐다고 봤다. 이 기준은 포퓰리즘을 바라볼 때도 유용하다. ‘나쁜 포퓰리즘’과 ‘좋은 포퓰리즘’을 결국 가르는 것은 공익·사익의 차이다.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