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 연 점수…대입 대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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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학에서 공부할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측정하기 위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행 7년 만에 난이도 조절 실패로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이러다가 2002학년도에 도입되는 새로운 입시제도의 정착에 수능시험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판이다.

출제당국은 당초 "3~5점 낮아질 것" 이라고 했으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 27점이나 올랐고, 만점자가 66명이나 됐다.

수능 채점을 맡은 중앙대 허형 교수는 "올해 수능은 난이도의 추정 오차가 컸다" 며 출제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나 난이도 조절 실패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수능시험이 본래의 취지에서 이탈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만점자 중에는 내신성적 불리를 감안해 고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친 수험생이 있고, 재수생이 재학생보다 무려 평균 17점 이상 높은 점수를 얻었다. 이는 고교교육 정상화와 사교육 억제라는 수능의 취지를 무색하게 한 것이다.

◇ 쉬워도 너무 쉬었다〓수능이 4백점 만점이 된 1997학년도에는 전체평균이 1백70.7점, 98학년도 2백12.5점, 99학년도 2백40.3점, 2000학년도 2백49.6점, 올해엔 2백77.2점으로 끝없이 오르고 있다.

난이도 조절 실패의 일등공신은 제1교시 언어영역. 2000학년도에 만점자가 10명에 그칠 정도로 어려웠다는 지적에 따라 2점 정도 쉽게 냈다고 했으나 결과는 19.5점 올랐다.

제2외국어는 응시자 4명 중 1명 꼴로 만점자가 나왔다. 언어별로 '쉽게 출제하기 경쟁' 에 몰입한 셈이다.

◇ 쉬운 수능의 맹점〓교육부는 "수능이 쉬워야 사교육이 줄어든다" 고 주장해 왔다. 특히 한 전임 장관은 "만점자가 수만명 생겨야 한다" 는 말도 했다.

하지만 학벌 위주 폐단이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 수능 난이도 조절만으로 입시.과외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서울대 유영제(劉永濟.교무부처장)입학관리센터장은 "수능이 쉬워져 사교육비가 줄었다는 주장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며 "난이도가 낮은 수능은 오히려 족집게 과외를 부추기고 중산층 이상의 학생에게 유리하다는 의심을 가질 수 있게 한다" 고 주장했다.

수능성적 위주로 뽑는 특차 제도를 그대로 둔 채 시험만 쉽게 낼 경우 '실수 안하기' 과외가 판을 친다는 것이고, 그런 우려가 이번 시험에서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쉬운 수능이 나름대로 효과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연세대 김하수 입학관리처장은 "고득점층이 두터워져 대학이나 학과의 서열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수험생들이 학과를 정한 뒤 대학을 선택하게 돼 바람직하다" 며 "특히 국문과나 철학과 등 소위 비인기학과에도 고득점자들이 소신 지원할 것으로 기대된다" 고 말했다.

◇ 대안은 없나〓한국교육과정평가원 박도순(朴道淳)원장은 "난이도 조정 기능을 제도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출제위원이 교수 위주로 짜여져 있고 현직 교사의 입김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능 문제에 일선 교단의 견해가 거의 반영되지 못해 현실과 동떨어진 쉬운 문제가 출제된다는 지적이다.

고려대 김성인 입학실장은 "원칙적으로 대학에 선발권을 맡겨야 문제가 풀린다" 고 말했다. 단 한차례 보는 수능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현행 체제를 개혁, 수능을 여러차례 볼 수 있게 하되 활용 여부는 대학 자율에 맡기는 식도 검토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강홍준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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