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오른 도쿄 '여성 국제전범 법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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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개정(開廷)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면서 ‘법정’은 엄숙한 분위기로 빠져들었다.8일 오전 10시 30분 일본 도쿄(東京) 황궁옆 구단(九段)회관.일본군의 군위안부 관련 전쟁 범죄 책임을 묻는 ‘여성 국제전범 법정’의 막이 올랐다.

이날은 일본군의 태평양전쟁 개전 만 59주년으로 증인으로 출석한 남북한을 비롯한 8개국 군위안부 피해자 70여명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판·검사 면면은 재판의 무게를 더해주었다.판사는 93년 유고 국제전범재판의 재판장인 가브리엘 맥도널드를 비롯한 4명이,수석검사는 각국의 인권운동가·학자로 구성된 검사단을 대표해 패트리샤 셀러즈 유고 국제전범재판 법률고문 등 2명이 맡았다.

재판은 기소장 낭독으로 시작됐다.기소장의 요지는 군위안부 동원이 노예화를 금지한 국제법에 위반된다며 당시의 히로히토(裕仁)일왕·군 간부·정부 고위관리를 소추하는 것.

셀러즈 수석검사는 “전후 도쿄국제전범재판에서는 군위안부를 비롯한 반인륜적 범죄는 재판하지 않았다”며 “이번 법정을 계기로 여성에 대한 반인륜적 범죄,성노예화를 끝내야한다”고 강조했다.

남북 검사들은 별도의 기소장을 공동으로 냈다.양측을 대표한 한국의 박원순(朴元淳)변호사는 “이번 재판은 ‘지연된 정의’를 위한 것”이라며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잘못을 되풀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남북은 총 8명을 기소했다.

오카무라 야스지를 비롯한 군위안소 운영관련 6명,도조 히데키(東條英機)전 육군상·총리,히로히토가 그들이다.

일왕 기소는 그가 최고통치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역시 검사로 나온 홍선옥 북한 종군위안부및 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 대책위원회 관계자는 “군위안부 문제는 일제 병사 개개인의 단순한 성적 강탈이 아니라 군부에 의한 조직적인 반인륜적 범죄”라고 역설했다.홍씨의 발표때는 방청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법정의 하이라이트는 남북 군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었다.종전 당시 미얀마 국경에서 임신 상태에서 구출된 처참한 모습의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북한의 박영심(朴永心·78)할머니는 처참한 당시를 회고했다.

“38년 양복점에서 일할 때 일본 순사가 돈을 벌수 있다고 해서 따라갔다가 난징(南京)·상하이(上海)등의 위안소에서 성의 노예가 됐다”….朴할머니는 몸이 불편해 미리 찍어둔 비디오로 증언했다.

재판은 나흘동안 열린다. 11일까지 각국 피해자의 증언을 들은 뒤 12일 판결을 내린다.판결은 구속력이 없지만 위안부 문제에 관한 최대 규모의 인권법정에서 내는 만큼 일본 정부의 책임에 대한 여론을 고조시킬 것으로 보인다.또 국제법 추세가 전시 성폭력을 처벌하는 쪽으로 가고 있어 이번 재판 결과는 국제형사재판소에서 군위안부를 문제를 다룰 경우 적잖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유고 전범재판에서도 여성을 성폭행한 군인이 기소된 바 있다.

이날 법정 주변에는 일본 경찰이 삼엄한 경계를 폈으나 우익단체들은 마이크가 달린 선전 차량을 동원,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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