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붕 네 학교 ‘공신’ 만들기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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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전 9시 서울 서대문구 인창고 5층 특별수업실. 방학 중 토요일인데도 올해 고3이 되는 학생 10여 명이 논술 수업을 듣고 있다. 이 학교 학생뿐 아니라 인근 중앙여고와 한성고 학생이 섞여 있다. 인창고 박진호(33) 국어 교사는 학생들이 제출한 논술 작문에 첨삭 표시를 해서 나눠줬다. 박 교사는 “500~600자 분량의 논술을 쓰기 위해선 지문을 읽는 독해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첫 단락을 어떻게 쓰느냐가 당락을 가른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각 인창고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인 한성고에서는 세 학교 1, 2학년 학생 50여 명이 수학·과학 심화학습 강의를 듣고 있었다. 세 학교의 수학·과학 교사들이 번갈아 가며 수업을 진행했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지붕 네 학교’가 각 고교의 최우수 학생을 우수 교사가 공동 지도하는 ‘공신(공부의 신) 만들기 실험’을 시작했다.

서울 인창고·중앙여고·한성고의 실험이 주목받고 있다. 6일 인창고 특별수업실에서 세 학교 학생들이 인창고 박진호 국어교사(오른쪽)에게서 논술 수업을 듣고 있다. [조용철 기자]

인접해 있는 인창고·중앙여고·한성고는 지난해 말 각 학교에서 학년별 10등 안에 드는 우수 학생 70명을 선발해 매주 토요일 수학·과학·논술 심화수업을 하고 있다. 인창고와 한성고에서 과목별로 나눠 수업을 하며, 세 학교의 해당 과목 우수 교사가 수업을 진행한다. 이들 학교가 힘을 합친 것은 사교육보다 나은 교육 환경을 공교육이 제공하자는 취지에서다. 서울시교육청 김대인 학교정책과 장학관은 “고교에서 이런 방식을 도입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학교들이 뭉친 것은 위기감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 학교의 2009학년도 4년제 대학 진학률은 39~42% 정도로 전국 일반계 고교 평균(60.1%)보다 낮다. 특히 올해부터 집과 멀리 떨어진 학교에도 지원할 수 있는 고교선택제가 실시되면서 학생들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 커졌다. 이재진 한성고 교장은 “이웃 학교끼리 고민을 털어놓고 ‘학교를 살려보자’는 데 공감했다”고 말했다.

우수 교사가 진행해 강의 수준이 높지만 수업료는 과목당 한 달에 4만~5만원 정도다. 학부모 김은미(45·여)씨는 “중앙여고에 다니는 딸이 세 학교에서 뽑힌 선생님에게서 수학 수업을 듣는데 선행 학습은 물론 매주 시험을 통해 평가도 해주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 달에 20만~30만원 하는 학원에 보낼 필요도 없어졌다”고 덧붙였다. 논술 수업을 듣는 이아진(18·중앙여고 2)양은 “다른 학교 학생과 함께 공부하니 정보를 나눌 수 있고 자극도 된다”고 했다.

공동 수업은 경쟁을 불러일으켜 학습 효과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이상렬(18·인창고 2)군은 “우리가 쓴 글을 칠판에 놓고 비교하기 때문에 학교의 자존심을 걸고 공부한다”고 말했다. 이들 학교는 학기마다 성적에 따라 공동 심화학습반을 재구성할 계획이다. 공부를 게을리했다간 탈락할 수도 있다. 박진호 교사는 “각 학교 교사끼리 모여 강의 계획을 짜다 보면 좋은 수업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경쟁도 된다”고 소개했다. 이들 학교는 다음 달부터는 주 4일 방과후 공동 심화반을 운영하고, 오후 10시까지 자율학습도 할 예정이다.

세 학교가 일을 내자 이웃 이화여대부속고도 함께 진학전략개발팀을 꾸리기로 했다. 올해부터 확대되는 입학사정관제 전형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나동철 중앙여고 교장은 “최고의 진학지도 교사들이 ‘윈윈’ 효과를 거둘 것”이라며 “네 학교 학생이 봉사활동도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지붕 네 학교가 뭉치자 서대문구청도 3000여만원의 심화반 운영 자금을 지원해 줄 예정이다.

글=김민상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4개 학교, 어떻게 뭉쳤나

▶인창고·중앙여고·한성고 최우수 학생 공동 심화학습

-각 학교 학년별 우수 학생 5~10명 선발 -3개교의 논술·수학·과학 우수 교사가 수업 담당

-매주 토요일 수업, 과목별 한 달 4만~5만원씩 -3월부터 주 4일(월·화·목·금) 방과후 수업으로 확대

-반 배치고사 공동 출제, 우수 학생 공동 관리 계획

▶3개교+이대부고, 진학전략개발팀 공동 운영

- 네 학교 진로 담당 교사 참여, 대학 입학사정관제 대비 공동 컨설팅 -연세대와 연계, 리더십 캠프 운영 방안 추진


“강의 노하우 모아 전교생에게 가르칠 것”
아이디어 낸 인창고 최용주 교장

인창고 최용주(61·사진) 교장은 중앙여고·한성고에 공동 심화학습반을 운영하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했다. 최 교장은 9일 “세 학교 교장이 공교육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면서 변화 필요성을 절감했다”며 “공교육이 힘을 뭉쳐 사교육을 이겨낼 방법을 찾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추진하게 됐나.

“고교 평준화로 학교 위상이 떨어진 데다 자율형 사립고까지 생기면서 우수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다. 가뜩이나 우수 학생층이 얇은 서대문 지역 학교들로서는 위기다. 그래서 세 개 학교의 우수 학생을 모은 뒤 우수 교사가 가르쳐 성과를 내보자고 뜻을 모았다.”

-공교육의 문제점은 .

“요즘엔 개천에서 용이 못 나온다. 공교육이 학생 성적을 끌어올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성적은 우수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있었다. 논술이 취약점이었다. 그래서 교사 8명을 붙여서 논술을 집중 지도했고 명문대에 입학시켰다. 평상시도 공교육이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

-앞으로 계획은.

“심화학습반을 운영하면서 습득된 강의 노하우, 그리고 강의 교재를 3개 학교의 다른 학생들에게도 적용해 전교생이 고루 성과를 거두도록 할 것이다.”

김민상 기자


중앙일보는 공교육의 모델이 되고 있는 전국의 초·중·고교를 소개합니다. 좋은 사례를 많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scho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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