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세상] 달라이 라마에게 배운 '말과 글'의 참된 모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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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세계적으로 알려진 종교 지도자를 떠올려 봅시다.

로마 교황청의 요한 바오로 2세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그러곤 쉽게 떠오르는 분이 없지요. 교황은 세계 10억 가톨릭 신자들의 정신적 지도자일뿐 아니라 그의 행동과 발언은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띱니다.

이에 비해 20만 티베트 망명정부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미미합니다. 그럼에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큰 바다와 같은 스승' 으로 달라이 라마를 모십니다.

"티베트 고원 전체가, 인간과 자연이 평화와 조화로운 균형 속에서 살수 있는 자유로운 피난처가 되는 게 내 꿈입니다. 티베트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속에 들어 있는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긴장과 압박으로부터 잠시 숨돌릴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

1989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세계인들을 티베트로 초대했습니다. 이 세상의 긴장과 압박의 피난처로. 그러나 그 피난처의 자연환경은 매우 열악합니다.

세계의 지붕으로서 숨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산소 부족, 내려보면 황무지요 굽어보면 눈덮인 산의 단조로움 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티베트를 찾아 의지할 곳 없는 자연환경 속에서 기댈 곳은 오직 마음 뿐임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고향으로 세계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각인돼 가고 있습니다.

지난 6월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에서 그를 '친견(親見)' 했습니다.

"정말 환생하신 부처님이십니까? 당신은 누굽니까" 고 물으니 "나 자신이 '살아있는 부처님' 으로 불리는 게 민망스럽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사람" 이라며 껄껄 웃으시더군요. 그러면서 이런 저런 질문에 구체적 예를 들어가며 아주 쉽고 재미있게 답해주었습니다.

답하기 어려운 것에는 '모른다' 며 그런 것들은 전문가인 누구누구에게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친절도 베풀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를 몇번 만나본 한 스님은 "그 분의 말을 듣고 있노라며 생시의 부처님 설법을 그대로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고 하더군요. 다른 큰 스님들의 말처럼 고도의 은유나 파격의 의뭉스러움이 아니라 쉬운 말을 가지고 직설적으로 본질적 문제들을 스스로 깨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 이게 불교의 설법에만 해당하는 것이겠습니까. 펄펄 살아 있는 삶에 가 닿지 못하고 개념이 개념만 물고 늘어진다든지, 참과 거짓을 구분할 용기가 없어 두루뭉수리로 능구렁이 담 넘듯 하는 말과 글들이 많습니다.

감출 것 없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과 글은 단순명확합니다. 숨길 것이 있기에 말과 글이 어렵게 꼬여 그 말을 쓰는 사회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사진작가 게일런 로웰이 사진에 담은 티베트 풍광을 달라이 라마가 해설해 최근 펴낸 '달라이 라마 나의 티베트' (시공사.9천8백원)가 말과 글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경철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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