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2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28. 깐깐한 타임지 기자

1976년 4월 나는 설레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학교에 정식으로 나의 최종연구결과를 보고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을 통해 지금까지 베일에 갇혀왔던 유행성 출혈열 바이러스의 발견을 공개했다.

76년 4월29일 모든 조간에 내 연구결과가 대서 특필됐다. 당시 대부분의 신문이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지금이야 한국의 연구역량이 일취월장해 세계최초 발견도 많지만 모든 것이 척박했던 당시로선 한국인 과학자의 연구결과가 신문 1면 머리기사로 게재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국내 언론뿐 아니라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해외 주요언론도 나의 발견을 보도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이박사(US trained Dr.Lee)' 가 세계최초로 유행성출혈열 원인바이러스를 찾아냈다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한국의 이박사' 가 아닌 '미국에서 공부한 이박사' 란 제목이 다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나의 학문적 토대가 미국에서 이뤄진 것은 사실인만큼 그들의 논조를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나를 당황케한 것은 언론보도후 한달 쯤 지나 다가왔다. 76년 6월 나에게 타임지의 동경특파원이 찾아온 것이었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성이 張씨로 기억되는 이 특파원의 임무는 과연 후진국 학자에 불과한 내가 지금까지 내노라하는 선진국의 석학들도 풀지못한 유행성 출혈열 바이러스의 발견에 성공한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타임지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잡지가 아니던가. 어느 정도 까다로울 것은 예상했지만 그의 취재는 나의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연구실에서 직접 나를 대면한 그는 여러가지 날카로운 송곳 질문을 찔러댔다. 연구의 절차는 물론 결과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내가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의 중간숙주로 규정한 등줄쥐의 학명까지 런던국립박물관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지금처럼 이메일이나 인터넷이 없었던터라 내가 제시한 등줄쥐의 학명(apodemus agrarius)과 실제 쥐의 사진을 대조해 런던국립박물관으로부터 틀림없다는 응답을 받기까지 며칠이 지났을 정도였다.

그 뿐 아니었다. 나와 같이 수도통합병원을 방문해 그곳에 입원해 있던 유행성 출혈열 환자의 혈청을 채혈한 뒤 자기가 직접 맹검검사(blind test)를 실시했다.

맹검검사란 객관적인 사실확인을 위해 환자와 정상인의 혈청에 아무 표시도 하지 않아 연구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항체를 이용해 환자의 혈청만 골라내는 실험기법이다.

그는 정상인 혈청 5개와 환자 혈청 5개를 섞은 다음 내게 맞춰보라고 요구했다. 나는 1백% 정확하게 가려냈다. 그랬더니 이번엔 수도통합병원이 아닌 미8군병원으로 가자는 것이 아닌가.

수도통합병원에선 혹시 사전에 짜고 조작할 수 있으니 좀더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한 미군병원을 선택한 것이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자신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했다.

물론 완벽한 결과가 나왔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Congratulations(축하한다)' 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지나고보니 나는 그의 프로정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많은 기자들이 처음 접하는 연구결과를 대할때 연구자의 말만 듣고 그대로 보도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과대포장을 일삼는 악의적인 연구자라면 언론이 이를 제대로 걸러주지 않을때 사회에 미치는 피해가 얼마나 지대할 것인가.

사실확인을 하지 않는다면 기자가 아닌 필경사라도 충분할 것이다. 나의 연구결과는 6월 타임지 한 면에 걸쳐 자세하게 소개됐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