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2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24. 영리한 쥐

유행성출혈열을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바이러스를 매개하는 들쥐의 습성을 이해하게 됐다.유행성출혈열은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들쥐의 80%를 차지하는 등줄쥐가 옮긴다.

등줄쥐의 소변으로 배출된 바이러스가 공기를 타고 사람의 폐로 전염되는 것이다. 등줄쥐는 등에 까만 줄이 있는 들쥐로 크기는 생쥐 정도로 작지만 민첩하고 점프력이 좋아 50㎝ 정도는 뛰어오른다.

주로 산과 들에 사는데 번식력과 모성애가 강해 등줄쥐가 이동할 땐 여러 마리의 생쥐가 어미젖을 문 상태로 함께 이동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만일 어떤 이유로 인간이 멸망한다면 인간 대신 지구를 지배할 동물로 가장 유력한 것도 바로 쥐다. 강력한 번식력에다 지능도 매우 높기 때문이다.

다음은 등줄쥐만 30여년 이상 잡아온 김수암씨의 목격담이다. 추수가 한창인 가을 포천의 한 농가에서 김씨는 마당에 벼를 말리려고 돗자리에 벼를 널어놓고 누워 있는데 돗자리 끝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등줄쥐 한마리가 돗자리에 널어놓은 벼 위를 뒹굴면서 벼 이삭을 몸에 묻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논둑에 있는 쥐구멍에서 기어나온 쥐가 개울 물에 몸을 적신 뒤 돗자리까지 와서 몸을 굴려가며 벼 이삭을 묻힌 다음 다시 쥐구멍으로 들어가 벼를 털어내는 것이었다. 새삼 인간 못지 않게 발달한 쥐의 지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쥐의 영험성에 비추어볼 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도 어쩌면 사실일지 모른다.

비록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진 못하지만 자신을 해치려는 인간의 의도만은 꿰뚫어본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강남 압구정동의 아파트 단지에서 우리에게 쥐를 잡아달라는 부탁이 왔다. 당시 김수암씨를 비롯한 우리 연구팀은 쥐를 잘 잡기로 소문난 국내 최고의 쥐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우리 연구원 2명이 아파트 단지를 찾아 수십개의 쥐틀을 놓았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쥐틀을 놓기 시작한 그날부터 쥐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사흘동안 한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분 나쁜 것은 쥐틀을 철수하자 언제 그랬냐는듯이 쥐들이 다시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항의를 들은 것이다.

이미 쥐틀에 잡힌 동료들을 경험한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인가 자신들이 다니는 통로에 사람들이 수상한 장치를 하느라고 부산을 떠는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여의도의 고급아파트에 사는 내 친구의 집에선 겨울만 되면 남자 양말이 없어져 찾는 소동이 빚어지곤 했다.

그것도 항상 한 짝만 없어졌으며 실크로 만든 값비싼 고급양말만 사라졌다. 여러 차례 그런 일이 있어 의아해 하던 차에 세탁기가 고장나 수리를 하면서 수수께끼가 풀렸다.

수리공이 세탁기를 손보느라 세탁기 내부를 살펴보니 전선을 쥐가 갉아먹어 고장이 났다. 그런데 세탁기 한쪽 구석에 그동안 없어진 실크양말로 만든 쥐의 집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시시한 나일론 양말이나 면 양말을 건드리지 않고 촉감이 좋고 따뜻한 실크 양말만 물어다 세탁기 안에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었다.

참고로 이처럼 영리한 쥐를 잡기 위한 요령을 소개할까 한다.

쥐는 늘 다니는 길이 정해져 있다. 이상한 물건이 길에 놓여 있으면 쥐는 그 길을 다시 지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에선 쥐틀 대신 강력한 접착제를 발라놓은 두꺼운 종이를 길목에 놓아 쥐의 발이 접착제에 들러붙어 잡는 방식으로 쥐를 잡고 있다.

우리는 흔히 '생쥐만한 녀석이…' 라는 말을 하며 쥐를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쥐는 결코 만만한 동물이 아니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