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실세의혹' 수사 물건너 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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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 동방금고 거액 불법 대출사건의 정.관계 로비 의혹에 대한 수사가 원점을 맴돌고 있다.

특히 국민적 관심사인 실세 정치인 개입 의혹 부분은 날이 갈수록 수사 중심에서 벗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 수사 의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이 사건의 성격은 뇌물과 로비를 바탕으로 한 대규모 금융 부정 범죄라 할 수 있다. 뇌물과 로비가 본질이라면 금융 부정은 부수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므로 금융 부정보다 뇌물과 로비 부분이 중점 수사 대상이 돼야 할텐데 검찰은 금융 부정 쪽에만 매달려 있으니 본질을 외면한 수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사건에 대한 검찰의 축소지향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는 여러 군데에서 감지되고 있다. 우선 금감원 간부나 정치권 인사와의 연결고리 가능성이 있는 장내찬(張來燦)전 금감원 국장에 대한 대응부터 문제가 있었다.

張씨가 주요 관련 인물로 떠올랐고 혐의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적극적으로 검거에 나서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張씨는 도피 중 금감원 관계자나 가족들과 연락을 계속 취했는데도 수사관들이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비어 있는 줄 알고 수사관이 張씨 집을 지키지 않아 자살 당일 張씨가 집에 들렀다가 나왔는지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張씨가 사건 관련 주변 정리를 할 수 있도록 검찰이 느슨하게 수사했다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검찰이 이경자씨보다 정현준씨를 더욱 압박하는 수사를 하는 것도 의문이다. 검찰 출두 전 鄭씨는 실세 정치인 관련 의혹을 제기하고 李씨는 이를 부인하는 상반된 입장이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鄭씨의 측근 인물은 대부분 구속됐고 강도높은 수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李씨와 가까운 인사들은 구속자도 적을 뿐 아니라 최측근 핵심 인물인 유조웅 동방금고 사장과 오기준 신양팩토링 사장은 해외로 도피하는 등 대조적이었다.

특히 吳사장의 경우 해외 도피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를 모른 채 소환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수수께끼다.

사건이 지닌 폭발력이나 파장으로 보아 이제 진실 규명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주요 관련자의 자살이나 해외 도피가 수사 미진이나 부실의 구실이 될 수 없고, 가.차명 가입자가 많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수사 의지다. 의지만 있으면 이같은 여건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정치인 관련 의혹은 사그라들지 않는데도 검찰 주변에선 수사가 마무리 단계라는 설이 나돌고 있다.

허황된 꿈을 가진 벤처 기업가와 부도덕한 사채업자가 소수 금감원 간부들과 어울린 단순 주가 조작사건으로 결론내린다는 것이다.

어정쩡한 수사 결과 발표로 검찰의 불신을 증폭시키고 정권에 부담을 주는 수사가 되지 않길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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