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읽기] 마음 다스리는 '영산회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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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향기는 사람을 그윽하게 만들고 거문고 소리는 사람을 고요하게 만든다. 향긋한 차를 끓여 마시며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면서 음악을 듣기에 좋은 계절이다.

매년 이맘때면 국립국악원에서 다례 시연을 겸한 연주회가 열린다.

몇해전부터 한국창작음악연구회가 '차와 우리 음악의 다리놓기' 라는 공연을 시작하면서 차를 마시며 듣는 음악이라는 뜻의 다악(茶樂)을 선보였다.

차의 은은한 맛과 향에 어울리는 음악으로 특별히 '다악' 이 아니어도 좋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음악이라도 그것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와 분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게 마련이다.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음악으로는 '영산회상(靈山會上)' 이 으뜸이다. 영산회상은 산조처럼 긴장과 이완의 대비가 심하지 않다. 리듬과 빠르기의 변화도 완만하다.

특히 20박 1장단에 메트로놈 30의 느린 한배로 연주되는 상영산은 마음을 가다듬던 옛 선비들의 정신으로 대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지루하게 느껴지기 십상이다.

선비들에게 음악은 감상을 위한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라 인격 수양의 필수조건이었다.

바른 음악을 연주하거나 감상함으로써 마음과 행위가 정결해지고, 감각과 신체의 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군자라는 인격체가 완성된다고 여겼다. 예(禮)로써 외형을 바르게 하고 음악으로 잡념과 욕심을 없애고자 했다.

선비들은 진세(塵世)의 티끌을 털어내고 우울한 기분을 풀어버리는 데는 음악이 시나 술보다 낫다고 보았다.

술이 아무리 좋기로, 빗자루처럼 온갖 근심을 쓸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거문고 연주는 정신수양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현실을 잊고 절대자유의 정신으로 안내하는 지름길이었다.

그런 까닭에 성현(成俔)은, 여러 기술 가운데 음악이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이어서 타고난 자질이 있지 않으면 그 진정한 정취를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음악은 소리를 떠나 존재할 수 없지만, 소리는 미(美)의 경지로 이끄는 물질적 매개일 뿐이다.

귀로 들을 수 없지만 마음에 내재된 연상.상상.감정.사유 등 여러 요소의 작용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음악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귀에 들리는 소리에만 마음쓰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영산회상을 들으면 혼탁한 기운은 가셔지고 정신이 쇄락해질 것이다.

따스함이 좋아지는 이 계절 예전 선비들이 사랑방에서 풍류를 즐기던 느낌을 되새기기 위해 한번쯤 공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여가가 없으면 고아한 거문고 소리며 청아한 시조가락을 곁에 두고 국화주를 마시며 가을밤 그윽한 명상에 잠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임미선 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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