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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것’을 ‘희다’고 판결해서는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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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번에 문제가 된 판결들이 1심 판결이라고는 하나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에서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강기갑 의원의 경우 많은 사람이 그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국회 사무처의 업무를 방해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서 무죄로 판단했다. MBC PD수첩의 경우 ‘주저앉는 소’를 광우병 소처럼 보여줌으로써 여중생들조차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며 촛불을 들고 울먹일 정도였는데, 과장이긴 하나 허위는 아니라고 판정했다. 과장과 허위의 차이는 무엇인가. 흰 것을 더 희다고 한다든지 검은 것을 더 검다고 할 때 ‘과장’이 되고, 흰 것을 검다고 하든지 검은 것을 희다고 할 때 ‘허위’가 된다. 광우병 소가 아닌 것을 광우병 소라고 보여주어 광우병 소동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허위가 아니고 과장이 되는 것인가.

숨은 그림 찾기처럼 일반 사람들이 모르는 숨어 있는 진실을 발견했기 때문인가. 혹은 정의와 진실은 항상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1심과 2심, 3심에서 각기 다른 판정을 함으로써 헤겔의 말처럼 정·반·합의 과정으로 판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인가.

삼척동자도 폭력으로 알고 있는 것을 사법부만 폭력이 아니라고 하고, 시중의 장삼이사(張三李四)도 ‘허위’라고 알고 있는 것을 사법부만 ‘과장’이라고 하니, 사법부는 플라톤이 말했던 것처럼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상한 지혜를 갖고 있는 ‘철인왕’인가. 아니면 일반 사람들의 상식과 순리를 무시함으로써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흉내 내기 위함인가.

흔히 판사는 양심과 법으로 판결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개인의 독단적인 편향과 독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영어로 양심을 ‘conscience’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라틴어의 ‘conscientia’로 ‘함께 안다’는 뜻이다. 누구와 함께 안다는 것인가. 자신의 또 다른 이성과 함께 안다는 뜻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과 더불어 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임의대로 판결해 놓고 양심을 말한다거나 항의하는 목소리에 대해 사법부의 독립을 위협한다고 강변한다면 ‘독불장군’을 연상시킬 뿐이다.

이번 판결을 보면서 산 아이를 놓고 다투는 가운데 진짜 어머니를 가려내는 데 성공한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보다 카프카의 ‘심판’에 나오는 주인공 요세프 K가 체험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황당한 판결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아는가. 판결에서 판사의 양심이 필요한 것은 판사 자신의 오만과 편견을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회의 건전한 상식과 순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는 판사 개인의 판단이 다른 많은 판사들의 판단은 물론 상식을 가진 국민들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형식은 단독 판결이라고 하더라도 정신은 합의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양심의 어원에 부합하는 판결일터이다.

상식과 순리에 반하는 ‘튀는 판결’로 사법부의 존재감을 돋보이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상식과 순리에 충격을 주는 그만큼 사법부의 권위는 실추된다. 판결은 단순히 검찰의 문제제기에 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전한 상식과 순리를 가진 사람들의 문제제기에 답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런 인식을 사법부가 갖지 못하는 한 사법부의 판결은 언제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