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기자가 본 북한] 중앙일보 김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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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으로 사상 최대 규모의 기자단이 '은둔의 땅' 북한을 밟았다. 중앙일보 김진 워싱턴 특파원과 LA 타임스 밸러리 레이트먼 기자가 바라본 북한의 표정을 싣는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역사적인 북한 방문을 마치고 25일 아침 평양을 떠난다.

훗날 북한의 개방사(開放史)가 쓰인다면 제일 먼저 굵은 글씨로 적힐 사람은 '마담 올브라이트' 일 것이다. 1년5개월 전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이 다녀갔지만 그는 북한의 중심을 직접 접촉하지는 못했다.

북한과 미국은 세계문명의 양극점에 서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의 마지막 문지기이자 '독자(獨自)주의' 의 실험자다.

미국은 자본주의의 최대 수호자이며 세계화의 패자(覇者)다. 이 양극의 접촉에서 생기는 여러 모습을 올브라이트의 2박3일은 잘 보여줬다.

다면적이고 복잡한 단막극이었다고나 할까. 미 방북단과 서방기자단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23일 저녁 5.1경기장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창건 55돐 경축 10만명 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북한측 표현)이었다.

천둥소리같은 기합과 함성, 형형색색의 옷과 깃발, 한사람처럼 움직이는 수천명의 어린이.학생.일반인.군인, 컴퓨터그래픽같은 학생들의 카드 섹션….

'인류 역사상 가장 잘 조직된 집단공연' 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공연은 충격적인 완성도를 보여줬다. 수출만 할 수 있다면 이 매스게임이 미사일을 제치고 대표상품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북한은 회담장보다 수백배 웅변적으로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학생들은 핵개발을 연상시키는 핵분열 장면을 연출했고, 카드 섹션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그려냈다.

군인 수백명은 천둥소리같은 함성을 지르며 총검술과 집단격파를 보여줬다. 카드 섹션은 이렇게 썼다.

'우리를 건드리는 자, 이 행성 위에서 살아남을 자리가 없다' . 대표단과 기자단은 한대 얻어맞은 듯한 침묵 속에서 눈앞의 행사를 응시했다.

끝나고 나선 "상상할 수 없는 행사" 라는 소감을 연발하며 매스게임을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이날 낮 미국 대표단이 먼저 마주친 북한의 모습은 또다른 것이었다. 북한은 화해와 친선의 뜻을 숨기지 않았다.

평양시 낙랑구역에 있는 정백2유치원. 어린이들은 '올브라이트 할머니' 가 도착하기 수십분 전부터 한복을 차려 입고 운동장에서 노래와 율동을 공연하고 있었다. 올브라이트 장관이 들어서자 어린이들은 춤을 췄고 엄마들은 박수쳤다.

이 유치원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식량계획 식량원조의 혜택을 받은 곳. 북한은 미국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유치원을 보여준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감동받은 듯 올브라이트 장관은 반주에 맞춰 춤을 따라했다. 북한의 어머니들은 이 재미있는 미국 할머니에게 웃음을 터뜨리고 손뼉을 쳤다.

5.1경기장과 정백2유치원. 그 양극의 공간 사이로 올브라이트 장관의 북한 방문은 진행됐다. 화해의 여정을 떠나면서 양국은 서로에게 성의를 보였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방북 첫 행사로 김일성 전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기념궁전을 참배해 북한 정권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전격적으로 올브라이트 장관의 숙소를 찾아가 회담했고 저녁엔 만찬을 주재했다. 그들은 서로 어울리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김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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