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러 관계 바로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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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주 한.소수교 10주년을 맞아 국무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한 이한동(李漢東)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면담하지 못함에 따라 한.러관계에 이상이 있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지난 6월 이정빈(李廷彬)외교통상부 장관이 푸틴 대통령과 면담을 실패한 후 발생한 것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 푸틴면담 무산 곡해 말아야

필자는 이러한 우려는 기우며 한.러 관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실질적인 동반자 관계로의 발전은 물론 한반도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긴밀히 협력할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됐다고 평가하고 싶다.

우리 정부는 지난 10년 동안 "한.러관계의 발전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반작용 때문에 일시적인 후퇴" 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반분야에서 꾸준한 관계발전을 이룩해 왔으며, 최근에는 양국간 '상호 동반자적 협력관계' 의 기반이 구축됐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러시아도 한.러관계가 수교 초기에 기대했던 만큼 만족스럽게 진전되지는 않았지만 양국관계가 점차 성숙기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단지 양국간 동반자적 협력관계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제반분야, 특히 경제.과학 및 군사.안보분야에서 '결과중시의 실질협력' 이 확대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우리 정부는 우리 기업의 대러투자(약 1억5천만달러)는 물론 정부간 경제협력이 아직도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李총리의 방러도 경제협력을 확대하면서 양국관계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졌다.

그렇다면 李장관 및 李총리의 푸틴 대통령과의 면담이 성사되지 못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필자는 지나치게 우리 입장에서 이들 면담불발 사건을 확대.왜곡 해석하면서 러시아를 탓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어떤 국가의 외교정책이든 자국이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국익이 있다. 우리의 경우 남북관계의 개선 및 한반도 평화와 안정유지가 대외관계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국익이다.

따라서 북한의 핵개발 및 정전체제의 무력화 시도 등이 발생했을 때 우리 외교는 탈러시아화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그 결과 이 과정에서 소외된 러시아측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반면 러시아는 옛 소련지역 국가들과의 협력확대 및 이들에 대한 영향력 유지, 그리고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의 권익과 신변보호를 가장 우선적인 외교정책 과제로 간주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러시아 외교정책에서 한국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우리 외교정책에서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비해 훨씬 작다.

李총리의 푸틴 대통령과 면담은 푸틴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일정 관계로 처음부터 확정된 일정이 아닌 잠정적인 스케줄 상태였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이 모스크바로 귀환한 12일에는 10:00~18:00 사이에 푸틴 정부 출범 후 강력한 국가건설의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중앙정부의 지방정부에 대한 통제권의 강화를 위해 최근에 구성한 '국가평의회' 의 회의가 개최돼 도저히 면담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이정빈 장관의 푸틴 대통령 면담은 애초 러시아 대통령이 외국의 외무장관을 면담하는 것이 지극히 이례적으로 시행돼 왔으며 5월 초 취임한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당시 산적한 국내외 문제해결을 위한 바쁜 국정운영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 수교후 꾸준히 관계개선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푸틴 대통령의 평양방문 등 러시아의 적극적인 대북(對北) 접근정책과 연내 불투명한 푸틴 대통령의 방한(訪韓)일정 때문에 이들 사건을 확대, 왜곡해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러시아가 자국의 우선적 국익을 제쳐두고 우리 국익을 위해 항상 협조할 것이란 순진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푸틴 정부는 강성대국 건설과 국제사회에서의 강대국 지위회복을 위한 전방위 실리외교를 추진해 오고 있다.

특히 자국의 안보위협에 핵심적인 지역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는 대한반도 정책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에서 외교.안보 이익이 최근 들어 점차 중시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경제.통상 이익이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러시아의 입장을 고려해 러시아의 한국 중시정책을 지속적으로 유도하는 보다 현실적인 대러정책(예 : 경협확대)을 적극 추진해 나가야 한다. 한.러관계가 악화되면 우리의 국익만 피해를 본다.

고재남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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