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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외규장각 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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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한 것은 1866년 병인년 10월 16일이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왕실의 전적(典籍)을 보관하는 두 개의 사고(史庫)가 있었다.

하나는 강화성 내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外奎章閣)이고, 다른 하나는 강화읍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진 정족산성 내 전등사 부근에 있던 장사각(藏史閣)과 그 별고인 선원보각(璿源譜閣)이었다.

외규장각에 보존돼 있던 화려한 장정의 신비한 서책에 눈독을 들인 로즈 제독은 장교들로 위원회를 구성해 나름대로 목록을 작성했다.

큰 가철서(假綴書) 3백권, 작은 가철서 9권, 흰색 나무상자 3개에 들어 있는 작은 책 31권, 지도 1점, 평면천체도 1점, 족자 7개, 한문이 적혀 있는 회색 대리석판 3개, 투구가 붙어 있는 갑옷 3벌, 가면 1개라는 '전리품 목록' 이 만들어졌고, 실물은 고스란히 군함에 실렸다.

소풍이라도 가듯 달랑 소총만 메고 정족산성에 접근했던 프랑스군 분견대가 조선군의 기세에 눌려 혼쭐이 나는 일이 생기자 프랑스 함대는 그해 11월 11일 강화도에서 철수한다.

그 바람에 정족산성에 보존돼 있던 사료는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로즈 제독은 약탈품 대부분을 황립도서관(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고, 남은 일부로 선물잔치까지 벌였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필사부 지하서고에 보관돼 있는 외규장각 도서 가운데 2백97권이 왕실의 각종 의례를 기록한 의궤(儀軌)들로 7년째 한국과 프랑스간 '뜨거운 감자' 로 돼 있다.

전시 약탈품이므로 조건없이 반환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절대 그냥은 못준다고 버티고 있다.

무조건 반환의 선례를 남길 경우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해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텅 비게 되는 사태를 프랑스는 우려하고 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국내에 복본(複本)이 없는 어람용(御覽用) 유일본 의궤 64권을 대여 형식으로 우선 돌려받고, 국내에 복본이 있는 비유일본 의궤 64권을 프랑스에 맞대여하는 쪽으로 타결의 가닥이 잡혀가는 모양이다.

유일본은 교환대상이 아니라고 버티던 프랑스가 한발 물러선 대신 우리는 프랑스가 고집한 등가 교환 방식을 수용한 셈이다. 한국은 실리, 프랑스는 명분을 택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문화재 약탈을 공인하는 꼴이라는 반발이 당연히 나오겠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이 있을까.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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