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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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9. 교과서 통째 암기

미국에서 의학박사를 따는 것은 예상했던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인조교 중 한사람은 3년째 학위과정 중에 있었는데 지도교수가 논문제목도 주지 않는다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을 정도다.

이국 땅에서 온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실력으로 보여주는 것 뿐이었다. 인종차별 등 미국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실력 앞엔 공정한 평가가 이뤄지는 곳이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몸이 부서져라 연구에만 몰두한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좌절은 세균대사학 시험에서의 실패였다.

세균대사학은 B학점(80점)이상 받아야 논문을 제출할 자격을 주는 필수과목이었다. 그러나 중간시험에서 나는 76점을 받았다.

순간 아찔했다. 기말시험에서 84점 이상 받지 못하면 박사과정을 접고 귀국해야 할 처지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내게 까다롭게 굴던 쉬러교수도 걱정이 됐던지 나의 기말시험 성적에 관심을 표명했을 정도다.

세균대사학은 수백가지 화학구조식이 어지럽게 등장하는 생소하기만 한 과목이었다. 화학에 대한 기초가 전무했던 나로선 강의 자체가 지옥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교과서를 통째로 암기하는 극약처방을 선택했다.

첫페이지부터 끝페이지까지 문장 자체를 한달 반 동안 밤새워 달달 외웠다. 내 생애에서 이때처럼 열심히 공부해본 적도 없었다.

당시 피와 땀이 밴 교과서와 강의노트는 지금도 내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그렇게 노력한 덕분인지 학기말 시험에서 나는 93점이란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원숭이와의 사투도 기억에 남는다. 박사과정 나의 연구주제는 원숭이 조직을 이용해 일본뇌염바이러스의 면역기전을 밝히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원숭이는 가장 값비싼 실험동물이었다. 내게 할당한 원숭이는 모두 8마리였다.

나는 2주간에 걸쳐 원숭이의 혈액을 4시간 간격으로 뽑아야했다. 물론 밤낮을 가리지 않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원숭이는 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영리하고 힘이 센 동물이었다. 실제 우리 실험실에선 원숭이를 대상으로 채혈하는 도중 원숭이 이빨에 물려 조교의 팔목에 구멍이 뚫리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래서 목에 줄을 잡아당긴 뒤 팔을 뒤로 묶고 석면장갑을 낀 채 원숭이의 허벅지 동맥에 주사를 찔렀다. 말이 실험이지 원숭이와의 사투라고 할 만 했다.

그러나 나의 학위과정이 고난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자동차와의 만남은 내게 즐거운 추억거리다.

다른 것은 탐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자동차만은 꼭 내 것을 타고 싶었다. 나는 자취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스튜드베이커란 중고차를 구입했다.

지금도 나는 운전할 때 백미러 대신 고개를 돌려 옆차선에 차가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은 순전히 미국유학시절 익힌 운전습관 때문이다.

미국에서 운전면허시험을 따려 했는데 차선변경때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백미러만 본 것 때문에 실기시험에서 낙방한 경험이 있었다.

자동차가 생겨서인지 석사와 박사과정을 합쳐 4년간에 걸친 미네소타대학 유학시절 미니애폴리스 시내를 벗어난 적이 없는 나였지만 딱 한번 작심을 하고 휴가를 이용해 동료들과 함께 미국 서부에 있는 옐로우스토운공원까지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자동차는 다른 용도로도 내게 도움을 줬다.

박사과정을 거의 끝낼 무렵인 1959년 8월 나는 저녁 찬거리를 위해 슈퍼마켓 식료품 진열대에 나왔다가 모처럼 한국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국인 여성 3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 미국에서 한국인 여성을 만나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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