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혜순 '잘 익은 사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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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 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서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 김혜순(45) '잘 익은 사과' 중

한 알 사과가 달디단 속살과 향기로 충만하기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숨어들어 갔을까? 김혜순은 살면서 눈에, 귀에 담아온 살이 찌는 소리들을 잘도 깎아내어 보여주고 있다. 여치소리, 자전거 바퀴 구르는 소리, 가을 바람이 빻아지는 소리, 손등을 덮어주는 구름,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 냄새. 자전거를 타고 사과 속을 달리는 이 요지경 같은 가을 여행!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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