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6. 희생양 된 원숭이

저녁 무렵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숙사 로비에 삼삼오오 모였다. 서로 연구분야는 달랐지만 낯선 이국땅에서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보니 점점 영어가 낯설기만 했다.

시간만 나면 한국사람끼리 모였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칠판글씨만 이해가 되었을뿐 교수들의 강의내용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러다간 큰일났다 싶었다. 나처럼 조교로 가서 미국인과 똑같이 석사과정 2년을 마쳐야하는 경우 모든 과목에서 B학점 이상(80점 이상)을 받아야했다.

게다가 이곳 시험출제방식은 단순한 사지선다형이 아니라 4개 항목중 정답이 복수인 이른바 '멀티플 초이스' 였다. 그러니까 4개 항목을 모두 꿰뚫지 않고 한 두개 항목만 알아선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니만 못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동료의 노트를 베끼는 것이었다. 주로 금요일 저녁에 빌려 토요일과 일요일 기숙사에서 꼼짝않고 노트를 베꼈다.

재미있는 것은 그래도 시험이란 실전엔 강해서 한번은 중간시험에서 나에게 노트를 빌려준 백인 조교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 겸연쩍은 적도 있었다.

강의뿐 아니라 실험실에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서울에선 기껏 염색 한 두번 해보는 것에 그쳤는데 이 곳에선 균을 직접 배양하고 동정하는 등 난생 처음해 본 실험을 직접 해야했다.

당시 미네소타의대 미생물학교실의 주임교수는 소아마비 바이러스 연구의 권위자인 시버튼(Syverton)교수였다. 그가 일년에 따오는 연구비만 당시 돈으로 1백만달러에 달했다. 지금이야 소아마비는 멸종되다시피한 바이러스지만 당시엔 위세가 대단했다.

미국에서 매년 5~6천명의 환자가 발생해 3천여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아도 다리를 저는 불구가 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대통령도 소아마비의 희생자가 아니었던가.

시버튼교수는 어느날 나를 자신의 연구실로 불렀다. 나에게 석사학위 연구논문의 주제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에게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미국과 달리 한국엔 뇌염이 풍토병처럼 유행하고 있으니 한국사람인 내가 일본뇌염을 연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문제는 그가 내놓은 연구주제가 그동안 나에게 익숙한 세균이 아니라 생소하기만 한 바이러스였다는 점이었다. 당시까지 한국인으로 바이러스를 연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이러스는 세균과 달리 현미경으로 보이지도 않고 일반 배지에선 자라지도 않는다. 바이러스 감염여부를 알기 위해선 사람과 비슷한 원숭이를 사용했다.

가령 소아마비가 의심되는 사람의 혈액을 빼내 이것을 원숭이 뇌에 주입해 원숭이가 마비증상을 일으키며 사망하는 것을 보고 소아마비를 진단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환자를 진단하기 위해 적어도 5마리 이상의 원숭이가 필요했다. 실험비용도 비용이려니와 원숭이에서 원하는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수주 이상 기다려야하는 것도 문제였다.

이러한 바이러스 연구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깨뜨린 것이 미국하버드의대의 앤더스(Enders)교수였다.

그는 51년 세계 최초로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원숭이의 콩팥조직에서 배양해 현미경으로 세포가 파괴되는 이른바 세포손상효과(cytopathic effect)를 관찰하는데 성공했다.

정상 콩팥조직과 감염된 콩팥조직의 현미경 사진을 붙여놓은 A4 용지 한장 짜리 논문 하나로 그는 195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의 공로로 굳이 원숭이를 여러마리 죽이지 않고 콩팥조직만 일부 떼어내 시험관에서 배양한 다음 여기에 의심되는 혈액 등 시료를 가해 현미경으로 세포손상효과만 관찰하면 바이러스 감염여부를 쉽게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