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범씨 13번째 시조집 '신전의 가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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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중진시조시인 이상범(사진)씨가 13번째 시조집 '신전의 가을' 을 펴냈다.

1963년 '시조문학' 을 통해 등단한 이씨는 현대시로 이동하거나 '겸업' 하지않고 고집스레 40년 가까이 시조를 지키고 있다.

91년에는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을 맡기도 한 이씨는 지금 서울 조계사 바로앞 집필실에서 창작에 몰두하며 때론 전국 각지의 사찰 주변 등을 떠돌며 시상을 모으고 있다.

"어지간히 살아온 생애, 아픔과 뉘우침 그리고 고달픔이 뒤엉겨 삶의 나이테를 두른다. 하나만을 붙들고 영위한 시의 터전, 그 사려의 떡시루에 자위가 돌아 영혼을 밝히고 있다. 먼데 별이 반짝인다" 고 서문에 밝히고 있듯 이 시조집에는 희노애락의 구체적 삶이 소화된 한 경지가 환히 펼쳐지고 있다.

절체절명의 순간 혹은 고승들이 '악' 하는 할로 전할수 밖에 없는 언어도단의 아픔과 깨달음까지도 이씨는 시조로 드러내려한다.

"세상 끝이 떠오를 때 먼 데 섬을 생각했다/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거친 날에도/초록 섬 다박솔의 꿈을 지울 수가 없었다./절망의 물결 저쪽 아스라이 뜨는 참별/돌아보면 섬은 거기 숨가쁘게 다가왔고/목놓아 울 수 없는 섬은 섬인 줄도 몰랐다." 끝간데 없는 절망을 섬으로 그려놓은 '섬' 전문이다. 자신의 존재 사실조차 흔들어버리는 크나큰 설움인데도 시조의 운율과 형식에 실려 격조를 잃지않는다.

"해풍의 줄칼에 깎여 곡선이 된 섬이 하나/진초록을 걸친 채 구멍 숭숭 거친 내면/가을엔 갈잎 빛깔로 돌도 물에 둥둥 뜬다. /어머니의 어머니적 땀냄새 돌려 받아/척박한 땅 기름지게 바꿔놓은 손을 본다/헌 책력 반질한 표지 갈색 닮아 질긴 숨결. /버려진 섬 버려진 흙 무늬놓던 여인들의/소금기에 절은 속살 감싸안은 뿌연 등피/갈옷은 옷이 아니라 한이 짜낸 빛이었다. " ( '갈옷 생각' 전문)

제주도 화산석에 숭숭 구멍이 뚫리듯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깊어 자신을 잊어버려야 가볍게 둥둥 물에 뜰 수 있는가.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이 깨달음을 이씨는 제주도 환한 가을빛 아래 드러난 제주 풍광에 싣고 있다. 제주 여인네들의 덜익은 푸른 감빛으로 물들인 치마의 처녀적 그리움과 고단한 삶을 덧보태며.

정형시로서의 시조의 미학은 풀어지면서도 결코 풀어지면 안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씨의 시들은 보여주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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