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리더들 희망은 불황보다 강하다] 5. "먼 미래보다 6개월 앞만 보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6면

20여년 전, '유성호접검'이란 무협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었다. 한 무림고수가 총애하던 호위 무사로부터 암살당하기 직전 침대 밑으로 탈출한다. 침대 밑에 연결된 굴 속에는 마차가 대기해 있다. 마부의 말. "20년 동안 이곳에서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고수는 마차를 타고 유유히 빠져나간다.

암살을 예견하고 20년간 마부를 대기시켜놓았다는 허무맹랑한 영화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늘 자신의 미래를 그려본다. 10년 뒤 나의 모습은. 20년 뒤 나는 뭐가 돼 있을까. 미래의 모습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는 무쌍하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NHN 김범수(38) 대표에게 머나먼 미래는 사치다. 그는 늘 6개월 후를 생각한다. "저에게는 1~2년 뒤를 내다보는 내공이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최고지요. 하지만 제겐 안 맞더라고요. 확실성이 떨어지거든요."

#단기 계획을 세웠다

1991년 여름, 김범수는 대학원 논문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후배 연구실에 들렀다. 연구실에서는 후배들이 PC통신을 통해 채팅하고 있었다.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컴퓨터를 통해 대화하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당시에는 컴퓨터 채팅이 드물었다). 그때 그는 무릎을 쳤다. "아, 얘네들은 세상을 다르게 사는구나. 내가 못 본 새로운 세상에 있구나."

그러고는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6개월 뒤 졸업할 자신의 모습을 그려봤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동시에 스스로 '잡기(雜技)의 명수'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그는 학창시절 바둑.포커.고스톱을 즐겼다. 당구도 300이다. 자신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미래는 여러 재미가 담긴 PC통신에 있다고 보고 이듬해 초 삼성SDS에 입사했다.

삼성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했다. 적성에도 맞았다. 그러나 옆 자리 선배 얼굴과 평범한 생활만이 보일 뿐이었다. 다시 6개월의 고민에 들어갔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98년 가을 시작한 것이 PC방 사업. 당시 PC방은 막 유행을 타기 시작할 때였다. 한양대 앞에 차린 PC방은 80평 규모였고 PC도 50대나 됐다. 낮에는 자신이, 밤에는 부인이 PC방을 지키는 24시간 체제로 운영하면서 제법 돈을 모았다.

그해 11월에는 후배들과 함께 5000만원의 자본금으로 '한게임'이란 회사를 차렸다. 마침 세상은 인터넷 열풍에 휩싸였다. 그러자 그는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 온라인 게임사업에 집중했다. 직원들에게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출퇴근도 없다"고 독려했다. 그 결과 한게임은 서비스 개시 3개월 만에 회원수가 100만명을 넘었다.

#운명을 피하지 말고 즐겨라

'6개월의 고민'은 2000년 겨울 다시 찾아왔다. 벤처거품이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초 삼성SDS 입사동기인 이해진 사장(현 NHN 부사장)의 검색사이트 '네이버'와 통합했지만 벤처업계 붕괴의 파도를 넘을 수는 없었다.

유일한 돌파구는 유료화였다. 1000만명의 회원 중 1%만 유료서비스를 사용해도 수익성이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유료화는 부가서비스를 대상으로 했다. 게임에서 이길 때 두 배로 따게 해주는 찬스 아이템 등을 파는 방식이었다.

사전에 유료화 얘기가 새어나가면서 회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대로 강행했다. 결정시점은 묘하게도 고민을 시작한지 6개월 만인 2001년 3월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유료화 첫날에만 1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것이다.

김범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권고한다. 낙천적인 그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그러면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지나치게 먼 미래를 보지 말고, 혹은 당장 급한 일에 치이지 말고, 짧게 끊어가며 단기계획을 세우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는 "회사가 커지다 보니 옛날 헝그리 정신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그래서 창업할 당시의 긴장감으로 다시 6개월간의 고민에 들어갔다.

글=정선구, 사진=임현동 기자

◆김범수는=1966년 서울 출생.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삼성SDS 재직 시절 호암미술관 소장품 화상관리 시스템과 유니텔 각종 버전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올 7월에는 서울 추계초등학교 4학년 2반 어린이 전원으로부터 초청편지를 받고 직접 "꿈을 기록하고 이미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NHN은 지난해 생산성본부 조사에서 검색포털서비스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1663억원의 매출과 654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