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마약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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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나라의 마약 뿌리는 의외로 깊다. 조선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본격적인 단속이 시작된 건 1980년대 후반 '범죄와의 전쟁' 이후다.

마약 정책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보건복지부(당시 보건사회부)가 담당하던 단속업무는 89년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으로 넘어갔다. 마약과의 전쟁을 위해서다.

◇ 국내 마약의 역사=역사학자들은 각종 사서(史書)를 인용, 마약의 뿌리를 조선시대 이전으로 잡고 있다.

중국과의 국경지대인 평안도.함경도에서 양귀비의 밀재배가 이뤄졌다는 것. 하지만 그 정도는 미미했고, 조선말기.일제시대에 와 '아편' 이란 이름이 보편화됐다.

대검 백서에 따르면 일본은 작업능력 향상을 목적으로 아편을 대량 생산, 군대.공장에서 반 강제적으로 사용하게 했다고 한다.

부산 외국어대 박강 교수(사학)는 자신의 논문에서 "1920~30년대 조선인구의 3.5%인 7만여명이 마약류 중독자였다" 고 적고 있다. 60년대는 일본 당국의 강력한 단속을 피해 일본 폭력단 야쿠자가 국내로 들어왔다.

태평양 전쟁 당시 제조기술을 익힌 한국인들을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주로 대만에서 밀수입한 염산에페드린으로 히로뽕을 제작, 일본으로 밀수출했다. ' 80년대까지 우리가 세계적인 히로뽕 제조국가라는 오명을 쓴 건 이런 역사 때문이다.

80년대 후반 정부의 밀조(密造).밀수출 단속이 강화되자 수출 경로가 막혔다. 국내 재고량이 급증했다.

유흥업소와 조직폭력배 등을 중심으로 마약류가 퍼져나간 건 이때. 90년대 이후에는 단속이 느슨하고 원료 구입이 쉬운 중국으로 제조기술자들이 건너갔다. 중국이 마약의 주요 공급지로 등장한 것이다.

◇ 주요 적발사건=91년 4월 나이지리아계 조직에 의한 헤로인 중계 밀수 사건이 적발됐다. 해외 폭력조직이 한국을 마약 중계지로 활용한 첫 사례였고, 이로부터 국제 공조수사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92년 3월에는 홍콩 트라이어드(三合會)에 의한 헤로인 밀수가, 지난해 9월에는 콜롬비아 밀수조직 등이 잇따라 적발됐다. 국내 폭력조직과 일본 야쿠자가 연계한 히로뽕 밀수도 98, 99년 연이어 밝혀졌다.

'조직' 에 의한 마약거래와 별도로 유명인사들의 '환각 파티' 사건은 심심치 않게 사회를 뒤흔들었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큰 아들 지만(志晩)씨. 마약 얘기를 꺼낼 때마다 '단골 손님' 이 돼버린 그는 다섯 번이나 히로뽕 투약사건에 적발됐다.

연예인들의 마약 투약사건도 잇따랐다. 이승철.신해철.현진영.이현우 등 인기가도를 달리던 연예인들이 추락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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