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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영어 선생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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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다음 두 가지 내용이 태반이었단다. “그들이 많이 들어와서 우리 국민들의 일자리를 뺏어가기 때문에 싫다”는 것과, “공짜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기 때문에 좋다”는 것.

그는 “너무너무 놀랐다”면서 외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국적의 백인인 자신도 ‘인종차별’을 느낀 적이 여러 번 있으니, 흑인이나 아시아 빈국 출신의 외국인들은 오죽 그렇게 느끼겠느냐고 덧붙였다.

필자도 두 가지 이유에서 크게 놀랐다. 첫째, 초등학생들의 영어 실력에 놀랐다. 문장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전해주는 내용들을 좀 들어보니, 요즘 초등학생들의 영어 실력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둘째, 그 내용에 놀랐다. ‘외국인’이라는 말에서 동남아나 아프리카 출신의 이주노동자 혹은 재중(在中)동포들을 떠올린 아이들은 주로 ‘우리 일자리를 뺏어가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영어권에서 온 백인들을 떠올린 아이들은 ‘공짜 영어 선생님’을 기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아이들이 평소 갖고 있는 생각일까, 아니면 숙제를 위해 부모에게 물어서 얻은 답변일지 궁금했다. 어느 쪽이든 ‘큰일이다’ 싶었다. 이미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한국 국민의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을 하게 만드니 말이다. ‘우리가 하기 싫은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대신 해주는 고마운 사람’이라는 답변이 많았더라면 차라리 덜 우울할 것 같다.

해외여행도 그렇게 많이 다니고, 외국의 영화나 드라마도 그렇게 흔히 접하고, 무역 규모도 엄청나게 큰데, 우리는 왜 아직도 외국인들을 그냥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는 걸까. 우리 국민이 외국에 나가 이주노동자로서 차별받으며 일했던 것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닌데, 외국에 살고 있는 친지 몇 명쯤 두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우리 국민의 해외 이주도 흔한데, 우리는 왜 외국인들을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거나 이용하려고만 하는 걸까.

여러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제화 지수는 매우 낮다. 나라 전체로도 그렇고 대학이나 기업 등 분야를 나누어 평가해도 그렇다. 영어를 잘하면 지수가 올라갈까? 제도나 시스템을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바꾸면 지수가 높아질까? 외국인을 ‘외계인’이 아니라 ‘지구촌 동료’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국제화 지수는 저절로 향상되는 게 아닐까?

현재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전체 인구의 2.2%이며, 서울만 놓고 보면 3% 정도다. 높은 도시 경쟁력을 자랑하는 뉴욕·런던·홍콩의 외국인 비율은 34%, 31%, 40%다. 이변이 없는 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외국인들과 부대끼며 살아갈 것이다. 당연히 우리 다음 세대는 더욱 그럴 것이다.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편견을 쉽게 버리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우리 아이들에게 전염시키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박재영 ‘청년의사’ 편집주간·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