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기씨 연작 장편 '종희의…'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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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포스트모던 어쩌고 하는 시대에 가방처럼 낡은 이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작업으로 여겨져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읍니다. 그러다 지난 8.15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이산의 아픔 속에 오랜 세월을 견뎌온 분들을 위해 이 작품을 펴내기로 했습니다."

작가 조성기(趙星基.49)씨가 연작 장편 '종희의 아름다운 시절' (민음사.7천원)을 최근 펴냈다.

출세작 '라하트하헤렙' 으로 1985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조씨는 신과 인간실존이라는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섹스.세태 등 사회의 현안과 동양 고전등을 아우르는 폭넓은 주제와 소재를 그것에 맞는 소설적 방식으로 다뤄오고 있는 중견작가.

'종희의 아름다운 시절' 은 표제작과 함께 '종희의 서러운 시절' , '타타르인의 참혹한 시절' 세편으로 엮어졌다.

마치 옛날 이야기 같이 단순한 가닥의 이야기이면서도 구수한 앞 두편과 여러 가닥의 이야기를 함께 진행시켜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면서 본질적인 무엇을 얻어내려는 실험적인 마지막 한 편을 집어넣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 독자들은 옛날 이야기 두 편과 최첨단 현대소설 한 편을 비교하며 읽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종희…' 두 편의 주인공 종희는 조씨가 한 때 세들어 살던 집의 안주인이었다.

원산 부잣집 출신의 그녀는 생전에 자주 옛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작가가 이를 들은대로 가감없이 소설화한 것.

'타타르인의 참혹한 시절' 은 전쟁포로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 아니 그것이 한 몸에 혼재된 극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짐승세상보다도 야비한 수용소 생활 이야기 중간 중간에 구애하는 숫놈을 잡아먹는 타란듈라 독거미, 다른 해파리를 잡아먹고 사는 해파리 등 냉혹한 동물의 세계를 사전의 해설식으로 들려준다.

또다른 한가닥 이야기는 미국에서 성공한 교포가 88서울올림픽 때 서울로 와 딸을 성형수술시켜 연예인으로 키워야겠다는 등 하잘 것 없는 이야기를 펼치며 극한 상황과 대비시키는 그야말로 포스트 모던한 작품이다.

서너시간이면 족히 읽힐 이 책은 가을날 삶과 추억의 의미를 재미 있고 깊이 있게 독자들에게 돌려줄 것 같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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