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으로 주가조작 250억 챙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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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달 서울의 한 골프 연습장. 검찰 수사관들이 골프 연습을 하고 있던 정모(45)씨를 체포했다. 정씨는 겉으로 보기엔 대형 입시학원과 전국 20여 곳에 커피전문점을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고급 주상복합에 살며 롤스로이스·벤틀리·벤츠 등 고급 수입차를 끌고 다녔다. 그러나 그의 실체는 자신의 가족들이 포함된 기업형 주가조작단의 보스였다. 그는 2003년 주가 조작(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집행유예형을 받은 뒤 7년 동안 이렇게 철저히 위장된 ‘이중 생활’을 해왔다.

정씨는 다니던 화학회사를 나온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주가조작에 뛰어들었다. 부당이득을 절반씩 나눠 갖는 조건으로 형제·부인·사촌동생·조카·처남·사돈 인척 등 12명으로부터 자금을 유치하고 주가조작에 가담시켰다. 가족도 모자라 친구, 학교 동문, 과거 회사동료, 산악회 회원 등 12명을 끌어들였다.

2007년 3~6월 가장 통정매매·허수매수 주문 등 수법으로 바이오업체인 J사의 주가를 1850원에서 8330원으로 끌어올려 30억원을 챙겼다. 이런 방법으로 2004년 6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1만788차례에 걸쳐 코스닥과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23개 업체의 주가를 조작했다. 이런 수법으로 이들이 벌어들인 부당이득은 무려 250억원.

이들은 금감원 감시 시스템을 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정씨의 지시에 따라 주가조작을 실행하거나 인터넷 폰이나 메신저로 아르바이트생에게 매매주문을 지시했다. 이 때문에 금융감독원도 검찰 수사 때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범행의 실체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검찰은 사업가로 위장한 정씨가 자주 골프 연습을 한다는 첩보를 입수, 오랜 추적 끝에 붙잡을 수 있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는 정씨와 사촌동생 고모(43)씨를 구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정씨의 부인·처남·사촌동생 등 18명을 불구속 또는 약식기소했다고 14일 밝혔다. 정씨 4형제 중 둘째 형(55)은 같은 혐의로 기소됐다. 정씨의 큰형(57)과 셋째 형(48)은 각각 체포영장과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돼 수배 중이다.

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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