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테니스 심리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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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코트 바닥은 내일쯤은 백선(白線)을 그을 만하게 습기가 걷혔다. 정연히 라인을 그어놓아도 난타(亂打)라도 할 벗의 흰 운동복이 되었을까. 사동을 보내 둔다.

론 테니스, 내 청춘의 감격이 무던히 바쳐진 론 테니스, 흰 라인, 하얀 네트, 흰 유니폼, 하얀 볼, 봄볕에 그을린 그들은 발랄하다.

라켓 든 손을 흐르는 혈조(血潮), 1초 전에 만들어진 정혈(精血)이리라. 페어플레이의 정신을 나는 론 테니스에서 얻었다 함이 솔직한 고백일 것 같다.'

시인 김영랑(金永郞)이 1940년 발표한 산문 '춘심(春心)' 의 한 대목이다.

일제 말이라는 시대배경을 감안할 때 내용이 너무 한가(?)해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테니스의 매력을 깔끔하게 표현했다.

확실히 교정이나 공원 한 편의 코트에서 울려퍼지는 테니스공 튕기는 소리는 비라도 갠 날이면 더없이 청량하고 투명하기만 하다.

그러나 프로 테니스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기에서의 중압감을 극복하고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테니스 심리학' 도 그래서 발달했다.

1993년 프랑스오픈 남자단식 결승전에서 챔피언 짐 쿠리어(미국)와 세르히 브루게라(스페인)가 맞붙었다.

챔피언은 자신감에 넘친 표정이었고 코트에서의 동작도 상대보다 훨씬 역동적이었다. 반면 브루게라는 명상에라도 잠긴 듯 행동이 굼떠 보였고 지친 듯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경기는 도전자가 메이저 대회 첫 우승을 따내는 결과로 끝났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브루게라는 특수 심박(心搏)조절 훈련을 받고 있었다.

경기에서는 정신상태가 너무 느슨해도, 지나치게 팽팽해도 안된다. 브루게라는 어떤 경기에서도 최적(最適)의 심장박동수를 유지하도록 훈련받은 끝에 승리했던 것이다.

긴장상태나 격렬한 운동 중에도 심장박동을 조절하는 훈련이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일본의 전통 가면음악극 노(能)에는 격렬한 발동작이 자주 나오는데, 노의 고수(高手)가 한창 발동작을 할 때의 심장박동수를 재보니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놀라운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이형택(李亨澤)선수가 US오픈 16강에 오르면서 한국 테니스사(史)를 새로 쓰고 있다. 오늘 새벽의 대(對)샘프러스전 결과도 궁금하지만 24세의 그가 혹심한 경기 스트레스를 어떤 방법으로 극복하고 세계무대에서 승승장구했는지도 듣고 싶다.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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