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은자는 산과 계곡에 숨고 큰 은자는 권력 한복판에 숨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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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호 09면

융중(隆中) 땅에 은거하던 제갈량을 찾아간 유비와 관우, 장비 세 의형제를 그린 상상도. 초야에 묻혔으나 천하를 삼분한다는 큰 계획을 가슴에 품고 있던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는 노력 끝에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

숨어 지내는 사람, 은자(隱者)의 삶에도 등급이 존재한다. 산이나 들, 계곡 깊은 곳에 숨어 지내는 사람은 작은 은자(小隱)다.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저잣거리, 일반 주택가에서 살면서도 자신의 고상한 정신세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중간 은자(中隱)다. 최고의 경지를 확보한 사람은 그보다 한 수 위다. 밤낮없이 권력을 가운데에 두고 치고 박는 정치판에서 청정한 마음 세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수퍼 은자(大隱)다.

유광종 기자의 키워드로 읽는 중국 문화-회색(灰色) <3>

이런 내용을 정리한 말이 전해진다. ‘작은 은자는 수풀 속에 숨고, 중간 은자는 저잣거리에 숨으며, 큰 은자는 조정에 숨는다(小隱隱于林, 中隱隱于市, 大隱隱于朝)’.
숨어 사는 사람에 대한 일종의 역설이다. 구름과 바람을 벗하면서 청정하게 살아가는 은자의 삶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실제 그런 거추장스러운 삶의 형식조차 따지지 않고 소란한 저잣거리에서도 마음을 잃지 않고 은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더 차원이 높은 은자라는 얘기다.

앞 장에서 설명했듯 숲이나 계곡 속에 은둔했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중국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은자들이다. 그 전통은 길고도 깊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속 제갈량(諸葛亮) 또한 전형적인 은자다. 유비(劉備)와 관우(關羽)·장비(張飛) 세 의형제가 찾아 간 초가집에 살면서 산 속으로 약초나 캐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그저 물끄러미 지켜 보고만 있었던 그 제갈량의 삶 말이다.

은자의 정신적 바탕은 아무래도 노장(老莊)의 사상에 있을 것이다. 무위(無爲)의 이치를 갈파하면서 세속의 가치에 대해 자유로운 일탈(逸脫)을 추구했던 그 사상체계다. 노자(老子) 자체가 어쩌면 이들 은자의 원형(原型)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잘것없는 말단의 관직에 있다가 홀연히 노새 등에 올라타고서 함곡관(函谷關)을 지나 세상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진 그 일생이 그렇다. 그는 함곡관을 나서면서 관문을 지키는 관리의 요청에 따라 『도덕경(道德經)』을 써서 후세에 남긴 뒤 홀연히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노자의 삶에 비해 공자(孔子)는 훨씬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는 도덕과 예의가 펼쳐지는 세상을 추구했다. 제자들을 이끌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자신의 뜻을 구현하려고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 곳을 지나고 있었다. 길을 잃었는지, 아니면 공자가 누군가를 목격하고 그랬는지는 분명치 않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를 시켜 길을 묻게 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도 불분명하지만.

자로가 밭을 갈고 있던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라는 사람인데, 세속의 가치를 멀리하고 자연 속에 숨어 살던 은자였음이 분명하다. 자로가 “나루를 건너가려는데 어디로 가는 게 맞느냐”고 물어본다.
장저라는 사람이 “저기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이 공자가 맞느냐”고 되묻는다. 자로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이 사람, 표정부터 바뀐다. 아주 비아냥거리는 듯한 표정으로 “공자가 맞다면 길을 내게 물어볼 필요가 있느냐”는 대답이다. 돌아온 자로의 대답을 듣고서 공자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아마 씁쓸했을 것이다.

공자가 물은 길과 장저와 걸닉이 언급한 길은 어쩌면 같을 수 있다. 그냥 걷고 타고 가는 길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는 길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열심히 세상에 뜻을 펼치려 들었던 공자는 이 두 사람의 은자에게 한 방 먹은 셈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현실 밀착형’ 가치관을 세우고, 문란한 도덕률을 비판하면서 현실 세계에 나름대로 정의로운 세상을 실현해 보려는 꿈을 꾸었던 공자는 은자의 삶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상식대로라면 현실 세계에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은일(隱逸)함만을 추구하는 이 은자들은 공자의 비판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공자의 정신세계에서도 이 은자들은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공자가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이라는 사람을 평가하는 말에는 이런 게 있다. “숨어 지내면서 마음대로 의사를 펼치고 있다…벼슬하지 않는 것도 나름대로의 한 방법이다(隱居放話…廢中權).” 마지막의 ‘폐중권’은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아도 (이런 경우에는) 권도(權道: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취하는 융통성)에 맞다’는 뜻이다. 은자의 삶에 대한 긍정이다. 『논어(論語)』의 한구석에는 또 이런 말도 나온다. “숨어 지내면서 그 뜻을 추구한다(隱居以求其志).” 은자들의 삶을 두고 앞의 구절에 비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긍정이다.

또 있다. “도가 행해지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有道則見, 無道則藏).” 더 노골적인 의지의 표출이다. “나를 필요로 하면 응하되, 필요치 않는다면 물러날 뿐이다(用之則行, 舍之則藏).” 이쯤 되면 ‘뭔가를 해 보다가 실현키 어렵다면 숨는 게 좋은 방법’이라는 점을 가르치고 부추기는 분위기다.

중국 사상의 축을 이루는 게 유교(儒敎)와 도교(道敎)다. 도교의 창시자 격인 노자의 삶 자체가 은일과 소요(逍遙)를 추구하는 탈 현실적인 은자의 모습이다. 노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시종일관 엄숙함과 진지함으로 인식됐던 공자도 이 은자의 삶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숨어 지내는 것, 자신을 감추고 내어 보이지 않는 것, 거칠 것 없이 내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행위에 대한 경멸 등이 그 안에 담겨 있는지 모른다.


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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