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만의 폭설이 준 선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48호 34면

세상이 난리다. 폭설에 차바퀴는 웽웽 헛돌고, 사람들은 짜증 내고, 언론은 그런 사람들의 가슴에 부채질을 한다. 탓할 사람도 많다. 기상청장이 제1 표적이 되었고, 삽질한 서울시장은 비난 폭탄을 맞았다. 지하철 타라고 한 대통령도 수난을 겪고, 날아다니지 못하는 지하철도 수난 중이다. 아! 이 세상엔 비난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죄송하다. 나는 이 눈이 고맙다.
1월 4일, 아침 일찍 나는 등산화를 단단히 동여매 신고 집을 나섰다. 우리 집은 대중교통수단으로부터 먼 곳에 있다. 산자락이라 눈 오면 차들도 못 다닌다. 수년 전 청와대 생활을 할 때도 그랬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장 차림에 등산화를 신고 나타난 나를 보며 “헐~!” 하셨다.

신년 첫 회의 시작이 9시. 차로는 15분 거리인 회사를 향해 7시에 집을 나서 버스를 탔다. 남산 터널이 막히기 전이어서 순조롭게 시내에 들어왔다. 그런 뒤 회사까지 또 걸었다. 명동성당을 지날 때는 쏟아지는 눈 속에 빛나는 성모마리아 상과 그 주변 불빛이 장관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이 세상에 있는 것을 자가용을 타고 다닐 때는 보지 못했다. 싱글벙글하며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다, 만세!”

눈이 와 땅에 물이 스며들어 농토가 숨을 고르고, 싹이 돋고, 풍요로워질 한 해를 상상하니 물 부족 국가 대한민국에 쏟아진 눈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차를 몰고 나오다 길에 갇힌 동료들 때문에 회의가 두 시간 늦은 11시로 미뤄졌다. 그들의 지옥 출근사를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일과 후 남은 질문은 하나. 이제 집으로 어떻게 돌아가나?

우리 집과 회사 사이엔 정확히 남산이 가로막혀 있다. 나는 남산을 도보로 넘어 집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따뜻한 국물로 저녁을 하고 산길에 들어섰다. 집까지 걸어가는데 3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다. 눈으로 새하얗게 덮인 남산이 노란 불빛들에 반사돼 천상경을 이루고 있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하고 사는 삶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내 나라, 서울 한복판에서 볼 줄 몰랐다.

남산 꼭대기에서 시내를 내려다 봤다. 하얗게 눈 덮인 도로에 차량이 없다. 강남으로 넘어가는 다리들이 한산하다. 세상이 조용하다. 나는 그 꼭대기에서 새해 소원을 빌었다. 진심으로 빌었다. 올해 내가 세운 계획들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빌고, 스스로 다짐했다.

정상을 지나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동을 나누고 싶었다. 한 분이 물었다.

“혼자 남산 가면 무섭지 않아요?” 답했다. “깡패들도 추운 날엔 집 밖에 안 나와요!”

어제도, 오늘도 나는 버스로 출퇴근을 했다. 평소보다 운동량이 많으니 체중계 바늘이 쭉쭉 내려간다. 종합검진 결과, 담당의가 불어난 체중 말고는 건강하다는 전화를 해 왔다. “스트레스가 많으신가 보죠? 1년 새에 체중이 많이 불었어요.” 답했다. “스트레스 없습니다. 외식 많이 하고, 운동 안 해서 그렇습니다.”

“콜레스테롤 수치도 좀 높습니다. 약을 드시든가, 운동을 하세요.” “옙!”
지난 며칠 새 나는 체중이 3㎏이나 줄었다. 걷는 게 이렇게 좋다. 세상도 더 구석구석 볼 수 있고, 신체에도 변화가 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 사회에서 사람들과 섞여 살고 있는 한 부분임을 실감하게 한다.

폭탄처럼 쏟아진 눈아, 고맙다. 눈으로 인해 나는 환경운동에도 참여하고, 내 건강을 돌보고, 길을 걸으며 사유하고 삶을 계획한다. 세상은 밉게 보면 밉고, 즐겁게 보면 참으로 즐겁기만 한 것이다. 상황에 분노해 가슴 끓이지 말고, 긍정의 눈으로 보자. 모든 상황을 자신이 더 낫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자. 한편으로, 정부는 비탈길에 미리미리 열선 처리 좀 하시어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