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본성과 양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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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과 양육
매트 리들리 지음, 김한영 옮김
김영사, 428쪽, 1만7900원

기원전 7세기 이집트의 프삼티크왕과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데릭 2세,15세기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각각 비정한 실험을 했다. 갓 태어난 영아를 외부 세계와 단절시켜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유모도 젖이나 밥을 먹이는 것 외에는 일절 말도 하지 않았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영아들이 나중에 커서 히브리어나 아라비아어·라틴어·그리스어 중 어떤 언어로 말을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언어로 말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아들은 커서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됐다.

사람이나 침팬지 등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FOXP2라는 유전자가 있다. 이게 고장나면 언어를 정상적으로 배울 수도 구사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유전자가 있다고 해서 스스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예를 든 전제군주들이 고립시켜 키운 영아들도 이 유전자는 있었지만 결국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언어는 선천적인 유전자와 교육이라는 두 가지가 합해지지 않으면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다.

인간의 능력은 타고 난다는 ‘본성’과 경험이나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양육’의 논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백년에 걸쳐 이어져왔다. 우주는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처럼 근본에 관련된 논제이다 보니 그 끝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본성과 양육’이라는 논쟁은 진부하게 비쳐지는 면도 있다.

과학저술가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인간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는 서양에서 벌어졌던 길고긴 이 논쟁을 실에 진주를 꿰어 목걸이를 만들 듯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장 자크 루소, 임마누엘 칸트, 찰스 다윈, 이반 파블로프,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란츠 보아스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본성론자와 양육론자들의 이론에 대한 허실을 읽는 재미는 한 여름 청량음료를 마시는 것 같다. 학창시절 과학 교과서에서 단편적으로 이들의 이론을 배우기는 했다. 그러나 리들리처럼 이들의 이론을 최근의 유전생물학 연구결과와 버무려 본성과 양육이라는 틀 안에서 비교분석한 것은 접하기 어려웠다.

리들리는 앞서 펴낸 『미덕의 기원(The Origin of Virtues) 』에서처럼 본성과 양육이 공존해야 할 필요충분조건을 유전생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치 수학공식을 증명하려는 듯 유전자 연구 결과를 장마다 빼놓지 않고 집어넣고 있다. 이러한 전개는 독자들이 책 내용에 대한 흥미와 신뢰도를 크게 높이는 효과를 가져오는 듯하다.

리들리는 ‘사람은 타고 난다’는 것을 대표하는 유전자가 경험이나 환경 없이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즉 유전자는 경험을 행동으로 훌륭하게 번역하는 기계장치라고 봤다. 원숭이가 뱀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실험실에서 자라 뱀의 무서움을 모르는 원숭이에게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원숭이가 뱀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들어 있다. 이를 본 실험실 원숭이는 뱀에 대해 공포를 학습으로 알게 된다. 그러나 꽃을 보고 놀라는 원숭이의 테이프를 보여주면 원숭이는 꽃이 무섭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는 유전적으로 뱀에 대해 공포를 느끼도록 이미 각인되어 있으며, 그 공포가 경험을 통해 쉽게 터득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꽃에 대해서는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게 없어 학습으로는 공포감을 느끼게 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이 책에는 그 흔한 삽화나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 하나 찾아볼 수 없다. 각종 유전자와 그 기능, 진화심리학 등 심오한 연구결과를 소개하는 대목이 곳곳에 나오는데도 그렇다. 내가 만일 리들리였다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렸을 것 같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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