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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글밭산책] 어머니의 젖가슴, 남도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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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색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
이청준·김영남·김선두 지음
학고재, 172쪽, 1만3000원

남도 출신 친구들에게는 평소에는 독특이고 술이 들어가면 청승이 되는 어떤 쓰라림 같은 것들이 있다. 그들이 내게 몇 번이나 그것을 설명해 보려고 했지만 우리는 늘 어떤 지점에서 서로 어색하게 고개만 흔들고 말았다. 굳이 골치 아프게 말하자면 이게 다 박정희 식의 불균형한 경제개발 덕택일 것이다. 작가 이청준, 시인 김영남, 화가 김선두가 낸 이 책은 아마도 그런 어색함일랑 다 버리고 쓰라림도 잊고 그저 자기들끼리 의기투합해서 그냥 실컷 고향이야기를 하자고 하는 책이다.

초등학교 동창녀가 운영하는 선창가 횟집이 있고, 할미꽃 군락이 있고, 분갑처럼 앉아 있는 친구의 노모가 있고, 나무라기보다 하늘로 오르는 용 같은 태고송이 있고, 억장이 무너지는 동백꽃 군락지 너머 바닷가에 “오징어가 순이의 팬티처럼 나부끼는 빨랫줄” 걸린 항구가 있는, 그들의 고향 장흥 말이다. 그들은 “첫 일정을 2003년 4월 회진항에서 배를 얻어 타고 봄비에 젖는 것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배를 얻어 타고 봄비에 젖는다는 대목에서 쓴 소주가 한잔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요즘 같은 불경기에 웬 호사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할 말은 없지만 우리가 무서워서 안하고,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들을 하고 그 대신 고독과 얼마간의 무능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고스란히 가져가는 것이 예술가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행각은 십분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 예술가라는 족속이 남도 땅에는 어딜 가나 넘쳐난다.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졸면 도착하는 오지, 장흥 법원에는 변호사가 하나도 없기로 유명하다는데 그 작은 관할구역 장흥 출신 작가는 이청준·한승원·송기숙·서종택, 그리고 이승우로도 모자라서, 시인 위선환과 김영남이 대흠에 이른다. 그들은 “이런 곳에서 글을 배운다면 시를 쓸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더니, 시인 곽재구의 입을 빌려 “열애처럼 끈적한 소설의 비가 내린다”고 한 술 더 뜬다. 작가들이야 엄살도 있고 과장한다고 쳐도 이 여성을 보면 그리이스인 조르바가 울고 갈 법도 하다.

“아침 요기를 위해 가까운 식당에 들렸더니, 바로 그 집 안주인이 간밤 소리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 우리가 농담 삼아 소리를 한 대목 들려줄 수 없겠느냐 물으니, 그녀는 대뜸 식당 문을 닫아걸며 대꾸해 왔다. ‘그럽시다, 까짓 거. 이놈의 밥장사야 내일 곱빼기로 하면 될 일이고 나도 어젯밤엔 목구녕 뜸만 들였제 진짜 소리는 뿌리를 못 뽑고 자리를 일어선 턱이니께!”

비에 젖는 회진항과 억장이 무너지는 동백꽃, 허름한 선술집, 아귀 안 맞는 장지문을 흔들며 터져나오는 여인의 소리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한국화라는 것이 이렇게 모던하고 자유롭고 아름답구나, 라는 것을 가르쳐준 김선두의 그림이 책 어디에나 펼쳐지는 것만도 고마운데 시인 김영남이 친구의 노모를 두고 이렇게 노래해 준다. “아직도 젖이 따뜻하고 좋으네요/ 하지만 그런 어리광 짓거리로 노인의 설움이 한 방울이라도 줄 수 있을 것인가 나의 부끄러움이 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이제 못 다한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이 설움으로 변색된 한숨과 눈물 주머니였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남도 출신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이 내게 다는 설명하지 못했던 어떤 “따뜻하고 뭉클한”젖내가 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장흥은 아마도 내게는 오래도록 늙은 노모의 젖가슴 같을 거 같다. 그래서 책을 덮을 무렵에는 이 가을, 그들이 자랑하는 호남오악 중 하나라는 천관산 문학공원에 가고 싶어진 것이다. 가서 “조랑말이 아니라 일렁이는 억새꽃을 타면” 글 바위에 시가 되어 누워 있다는 구상시인의 소리가 들려올 듯도 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 / 바로 꽃자리니라”

공지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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