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에서 두 번 살아남은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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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각각 투하됐던 원자폭탄 모두에 피해를 입었던 ‘이중 피폭자’가 4일 사망했다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이 7일 보도했다. 주인공은 야마구치 쓰토무(山口彊). 93세. 사인은 위암이다. 이중피폭자는 165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야마구치만이 일본 정부로부터 인정받았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1945년 8월 6일. 당시 29세였던 야마구치는 미쓰비시 중공업에 근무하는 기술자로 히로시마에 출장 중이었다. 원폭이 터진 순간, 야마구치는 투하 지점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막 전차에서 내리던 중이었다. 당시 그는 고막이 터지고 상반신 전체에 화상을 입는 피해를 봤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이날 히로시마에선 약 8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야마구치는 피해자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고향인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8월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번째 원폭 공격의 피해자가 됐다. 그는 생전에 “당시 나가사키에서 상사에게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상황을 설명하던 중 갑자기 히로시마에서 봤던 것 같은 흰빛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고 회고했다. 사흘 사이에 두 차례나 원폭 공격을 당한 것이다. 이날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은 약 7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지 엿새 뒤인 8월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야마구치는 생전에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원폭 투하로 생기는) 버섯구름이 히로시마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줄 알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일본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두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뒤의 삶은 보너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번의 원폭 공격을 겪었음에도 야마구치는 놀라울 정도로 건강한 여생을 보냈다고 그의 가족들은 전했다. 종전 뒤 일본에 주둔한 미군기지에서 일을 하다 교편을 잡았으나 결국 미쓰비시 중공업으로 복귀했다. 딸 야마자키 도시코는 “아버지는 원폭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며 “큰 부상을 입은 피폭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반핵 투쟁에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만년에 이르러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회고록을 집필했고 2006년엔 이중 피폭자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지난해 6월 나가사키에서 강연을 하면서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핵무기를 금지해달라고 탄원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공개했다. ‘타이타닉’ 등을 연출한 미국 영화감독 제임스 카메론이 야마구치 생전 그를 찾아와 원폭 관련 영화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IHT는 전했다.

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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