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이산상봉] 최인호 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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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가야, 날이 저물었다. 청사초롱에 불 밝히고 앞장서거라.

내 슬픈 이야기 하나 들려줄거나. 서정주님의 작품에 '신부(新婦)' 라는 시가 하나 있는데 다음과 같느니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푼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후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푼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아가야, 이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슬프쟈. 오줌 싸러 나가다가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려 신부가 음탕하다고 오해를 하고는 그 길로 달아나 버린 신랑. 그로부터 40년인가 50년이 지난 뒤에 찾아가 보니 신부는 첫날밤 모양 그대로 고스란히 앉아 있었고, 어루만지자 그제서야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았다는 얘기가 정말 슬프쟈.그러나 아가야. 이보다도 슬픈 얘기가 많이 있단다.

자전거를 구하러 나갔던 남편이 그 길로 떠난 뒤 50년 만에 살아서 돌아왔다는구나. 오줌 싸러 나갔다던 새신랑보다 더 어렸던 신랑들은 잠깐 나갔다 돌아온다고 길을 나섰다가는 그대로 생이별을 하였다는구나. 50년 만에 돌아와 보니 신부는 첫날밤 그대로 앉아 있다는구나. 빈 집을 오래 두면 거미줄 치듯 신부의 얼굴에 주름이야 거미줄처럼 생겨났겠지만, 빈 집을 오래 두면 정원에 잡초가 자라듯 신부의 얼굴에는 잡초야 무성하겠지만, 아가야 이제는 어찌할거나, 이 무정한 세월을 어찌할까나.

신부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운들 그 무정한 세월을 어찌하겠느냐. 아가야, 형은 국군이 되고, 아우는 인민군이 되어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누며 싸웠다는구나.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면서, 왜 싸우는지 모르면서 광기에 휩싸여 형이 아우를 죽이고, 아우가 형을 쏘았다는구나. 에미는 하루아침에 아들을 잃어버리고 딸은 하루아침에 에미를 잃어버렸다는구나. 그래서 모두들 이렇게 사는 것은 필경 전생에 죄가 많아 이렇게 사는 것이라 믿었는데, 전생이 무슨 얼어죽을 놈의 전생이란 말이냐.

아가야!

만나서 울고 또다시 헤어지고, 아이고 오마니 아이고 아바지. 그 얼굴 얼싸안고 더듬어보고 울고 또 울어도 헤어지면 그뿐이다.

헤어지면 또 다시 남남이다. 마치 슬픈 영화보면서 실컷 울고 난 뒤 밝은 불이 켜지면 극장 문을 나서는 기분에 지나지 않는다. 아가야, 잠시야 기분이 후련하겠지만 얽히고 얽힌 가족의 인연은 어찌할 것인가.

이산가족이야 50년 만에 만나서 한바탕 울면 한이라도 풀리겠지만 같은 하늘, 같은 지붕 아래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이야 또 어찌하겠느냐.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이불을 쓰고, 분홍빛 잠옷을 입고 코피가 나도록 사랑을 하여도 남과 북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오늘날 우리들 무관심의 이산가족들은 또 어찌하겠느냐.

그러므로 아가야, 이번이야말로 에미가 무엇인지, 애비가 무엇인지, 신랑이 무엇인지, 아들이 무엇인지, 가족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마지막의 잔치란다.

이제 서서히 그 잔치도 끝나간다. 또다시 서정주님의 시처럼 잔치는 끝나간다.

그렇구나 아가야. 어차피 우리들은 조금씩 취해가지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살다 보면 눈물도 한갓 호사스러운 사치며 살다 보면 그리움도 중독된 쾌락이다.

50년이나 기다리다 마침내 어루만짐 한번에 매운 재가 되어 스러져버린 새색시처럼 미움도 증오도 원망도 한숨도 폭삭 내려앉아 버리고 아가야. 이제라도 신방을 꾸미자. 낡은 흙벽에 도배를 하고 촛불 하나 밝히고, 늙은 할멈 얼굴에 연지곤지 찍고,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 입히고 늙은 할멈은 업어라. 늙은 할멈을 업고 신방을 한 바퀴나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돌아보거라. 귀신이 웃으면 부적을 붙이고, 원귀가 통곡을 하면 굿을 하면서 밤이 새도록 합방을 하리니.

아가야, 청사초롱에 불 밝히고 앞장서거라.

최인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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