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유창훈 전 주월백마사단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톨스토이는 일찌기 "전쟁은 가장 비열하고 부패한 인간들이 힘과 영향력을 얻는 상황을 만든다" 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지난 5일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유창훈(柳昌燻.육사 5기)전 주월백마사단장은 생의 주요한 고비를 전쟁터에서 보냈으면서도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의 기억속에 '진정한 무장(武將)' 으로 각인돼 있다.

한국전쟁과 5.16, 그리고 베트남전쟁이란 '역사의 탁류' 가 그를 휘감았지만 그는 몸과 정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수많은 전장에서 혁혁한 무훈을 세운 그는 여느 정치군인들처럼 허욕에는 곁눈질을 하지 않았던 참 군인이었다.

전장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동안 고인이 받은 무공훈장은 18개. 포장과 기장을 합하면 35개나 된다.

보훈처 관계자조차 "무공훈장을 5, 6개까지 받은 군인은 본 적이 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고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러면서도 "부족한 경비를 한푼이라도 남겨 국고에 반납할 정도로 강직하고 청렴했다" (李大鎔 전 주월공사.육사 7기)는 게 주변의 일관된 증언이다.

평북 영변출신의 고인은 1946년 월남한 뒤 육사에 입교, 50년 옹진지구에서 6.25를 맞았다.

서울 수복당시 국군 17연대의 일선 중대장으로 미군과 함께 한강도하에 성공하는 전공을 세웠다.

베트남전 때는 국군 3개 전투부대(백마.맹호.청룡)중 하나인 백마사단을 맡아 대규모 작전인 백마 9.10호 작전을 비롯, 수많은 국지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런 고인의 화려한 전력(戰歷)은 상당 부분 채명신(蔡命新)장군과의 인연에 기인한 바 크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68년, 후방사단인 35사단장으로 밀려나 퇴역을 바라보고 있던 고인을 전격적으로 베트남전에 발탁한 것이 蔡씨였다.

초대 주월사령관으로 부임한 蔡씨가 "柳장군 같은 군인이 필요하다"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력히 천거한 것이다.

고인의 강직한 성정은 두 사람의 만남에서 잘 묻어난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고인은 논산훈련소 수영연대장(중령)을 맡고 있던 중 육사 동기생인 蔡씨를 상관으로 맞이하게 된다.

논산훈련소는 훈련병만 해도 4만여명에 달하는 대부대로 각종 보급품을 놓고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을 때였다.

蔡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훈련소 참모장으로 부임했더니 군 내부에 수영연대장을 날려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치더군요. 내막을 알아봤더니 이 사람이 비위군인들을 사정없이 잘라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눈썹하나 까딱않더라구요"

감명을 받은 蔡씨는 되레 고인을 불러 "네가 하는 일은 무조건 도와줄테니 보안부대 요원이든 누구든 무조건 잡아넣으라" 고 독려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인생이란 '직선' 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장애물이나 험로가 생기면 타협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일직선으로 돌파해 나갔다.

그 바람에 남들보다 멀리 나가진 못했고, 진급과도 멀어졌다.

75년 제1군 부사령관을 끝으로 소장으로 예편한 고인은 25년을 야인으로 소일해야 했다. 그 사이 고인이 받은 훈장의 의미도 일각에서 제기하는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양민학살 주장 등과 함께 희석돼 갔다.

고인의 차남 재연(在淵.46)씨는 "격동의 시대를 보낸 사람들 대부분은 역사의 희생자들 아니겠냐" 며 "아버님은 시대 상황에서 주어진 본분에 최선을 다한 분" 이라고 강조했다.

강민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