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한용운 '산촌의 여름 저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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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산 그림자는 집과 집을 덮고

풀밭에는 이슬 기운이 난다

질동이를 이고 물긷는 처녀는

걸음걸음 넘치는 물에 귀밑을 적신다

올감자를 캐어 지고오는 사람은

서쪽 하늘을 자주 보면서 바쁜 걸음을 친다

살진 풀에 배부른 송아지는

게을리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등거리만 입은 아이들은

서로 다투어 나무를 안아 들인다

하나씩 둘씩 들어가는 까마귀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 한용운(1879~1944) '산촌의 여름 저녁'

지금은 찾기 어려운 산골 마을의 여름 풍경이 시인의 가슴에 찍혀 오래두어도 빛 바래지 않는 사진으로 남아 있다. 질동이에 물긷는 처녀, 등거리만 입은 아이들…. 내 어릴적 마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저 '님의 침묵' 으로 천둥같은 울림을 이 땅에 심고간 만해, 그 큰 자취를 기려 어제는 백담사에서, 내일은 수덕사에서 시의 축제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산사의 여름 밤하늘의 별빛이 더욱 찬란할진저.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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