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학] 제주도서 집필몰두 소설가 천승세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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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예술은 행운이 아니라 운명이다." 비장하게 되뇌며 며칠전 작가 천승세(千勝世.61)씨는 제주도에 갔다.

삼복더위 무서워 시원한 바닷가로 내려간 것은 아니다. 중산간 마을에 민박 방 하나 얻어 30년전부터 구상.집필한 장편 '빙등(氷燈)' 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천씨는 한국소설의 대모 박화성을 어머니로 하여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떨어져 산 미움으로, 밤새 원고와 씨름하는 안쓰런 모습 때문에, 천씨는 절대 글과는 멀리하려했다.

학창 시절 오기와 주먹으로 목포 선창가를 주름잡던 천씨는 그러나 운명처럼 소설에 빠져들어 19세 때 문단에 나왔다.

'황구의 비명' '신궁' 등의 소설집과 희곡 '만선' 등을 통해 특히 바다 사람들의 굽힘없는 생명력을 힘차게 그려온 그가 반평생 운명처럼 매달리고 있는 작품이 '빙등' .

허먼 멜빌의 '백경' 을 뛰어넘는 해양소설, 운명과의 사나이다운 대결을 그린 작품을 쓰겠다며 천씨는 1973년 원양어선을 탔다.

춥고 험난한 캄차카해역에서 6개월간 동태 배를 따고 얼리는 잡역부 선원으로 일했다. 오로지 소설을 위해. 그리고 이듬해부터 월간 '한국문학' 에 연재에 들어갔다.

그러나 반체제 작가라는 이유로 당국의 압력에 의해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90년에 다시 한 월간지에 연재를 재개 했으나 그 잡지 역시 정치적 이유로 폐간됐다.

"개같은 ××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체통을 위해서였는데. 해양입국 외치려면 작가가 목숨 걸고 북양에 갔다왔으면 작품 내놓읍시요 하고 줄을 서야 되는 것 아니냐. 도대체 이런 나라에서 글 쓴다는 것이 천추의 한이야. "

덩치 큰 서양개에 능욕 당하는 황구를 통해 반미감정을 드러낸 '황구의 비명' 같은 작품뿐 아니라 천씨는 70, 80년대 민주화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선 반체제 인사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평생 자신의 문패 하나 붙일 집 한 채 소유하지 않으려는 그는 삶과 운명 자체에 대해서도 반체제다.

"사회적인 불의나 정치적 폭력, 권위에 맞서기는 쉽다. 명분이 있으니까. 그러나 진정한 진보주의자.예술가라면 삶에의 안주(安住), 그 당연하지 않은 편안함과 혹독하게 싸워야한다. 그래서 거칠것 없이 웅혼한 정신과 사랑을 드러내보여야 한다. 예술과 문학은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사람들은 예술을 돈줄 잡고 명예 드높이는 행운쯤으로 여기고 있으니, 한심한 ×들이라고."

사납고 근육질적인 그의 입담에서 의외로 '사랑' 이란 말이 섞이자 도대체 어떤 사랑이냐고 물으니 육친애적 사랑이라고 한다.

임종을 며칠 앞둔 소설가 계용묵이 찐빵이 먹고 싶다고 하자 직장에 출근않고 한겨울 아침마다 식을세라 빵을 가슴에 품고 미아리고개를 뛰어오르던 소설가 오영수.

전에는 예술과 예술인들에게 그런 육친애적 사랑이 넘쳐났는데 요즘에는 이해관계로만 맺어지고 있다고 질타한다.

'빙등' 을 탈고하고 나면 그 육친애적 사랑을 살고간 사람들의 이야기 '꽃 같은 세월아, 꽃 같은 사람아' 를 집필하겠다 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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