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라스베이거스·실리콘밸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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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0세기는 도시화의 세기였다.

도시화를 통해 20세기 문명은 전시대가 이루지 못했던 많은 것을 이룬 대신 지구의 많은 미래를 잃기도 했다.

동양세계의 도시문명과 서양의 도시문명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20세기의 도시화는 서양도시가 주도한 것이었다.

20세기의 대표적 도시는 단연 맨해튼과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밸리다.

런던.파리.베를린 등 유럽의 도시는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역사적 진화를 통해 현대도시가 된데 비해 맨해튼과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밸리는 역사적 진화가 아닌 새로운 패러다임의 20세기 도시다.

동양도시가 주도할 21세기의 도시화 역시 역사적 진화가 아닌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시화가 될 것이다.

맨해튼과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밸리가 어떻게 해서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도시가 될 수 있었을까. 맨해튼과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밸리는 20세기 문명의 도전을 정면에서 수용해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냈다.

뉴욕이 보스턴과 필라델피아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무역.금융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내륙으로 이어지는 운하와 바다를 잇는 네트워크를 장악해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식민지들이 독립해 세계시장의 재편이 이뤄지고 있는 역사적 전환의 시기를 적절히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백년 역사의 맨해튼에 비해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밸리가 반세기만에 세계도시가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거의 아무 것도 없던 황량한 벌판이 어떻게 연간 3천3백만명이 찾는 세계 최고의 관광도시가 되고 샌프란시스코의 변두리 농장지대가 어떻게 해서 세계 최고의 지식산업도시가 됐을까.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밸리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다.

옛 도시건설에는 정치권력과 자본의 조화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밸리는 정부의 개입 없이 인간의 창의력과 시장경제가 만든 도시다.

그들은 역사의 진화를 넘어 끊임없는 새로움과 더 나은 가치와 아름다움과 이익을 추구했다.

훌륭히 기능하고 있는 호텔을 철거하고 더 크고 아름다운 호텔을 세우는 일은 라스베이거스의 상식이며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상품을 스스로 대치하는 파괴적 창조는 실리콘밸리에서 일상적으로 시도되는 일이다.

20세기가 이룬 가장 성공적인 이 두도시가 어떻게 해서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됐을까. 한마디로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와 인화(人和)가 절묘하게 집합했기 때문이다.

세계대공황과 두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닥친 세계질서의 재편 속에 도시가 지역중심이 아니라 어번 네트워크의 거점이 되는 시점에서 공간적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곳에 사람과 자본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를 예지한 천재들이 집단적으로 모여들고 그들을 따라 자본과 인력이 이동한 것이다.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밸리의 건설에 정부가 한 일은 옛 도시건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아이디어와 의사결정은 철저히 시장원리와 창조적 상상력에 의해 이뤄졌다.

동북아시아, 특히 서해 일대에 천시와 지리가 있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예견하는 일이다.

세계 최대의 자원과 인력을 가진 동북아시아는 21세기의 세계도시가 일어설 수 있는 가장 가능성이 큰 지역이다.

인천국제공항을 건설한 일은 동북아 어번 네트워크를 선점한 것이므로 남북교류가 단순한 남북화해를 넘어 발해만 일대의 새로운 도시공동체 구성의 큰틀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면 이를 결합해 세계 최고의 도시를 만드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의 도전이다.

동북아에서 가장 인문적.지리적 여건이 뛰어난 영종도.강화도 일대에 자연과 상생하는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밸리를 넘어서는 21세기 최고의 도시를 만드는 기적을 실현시켜야 한다.

남북의 인화가 천시와 지리의 역사적 도전을 창조적 응전으로 이어 세계도시를 건설할 수 있으면 세계로 향한 새로운 도약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석철(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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