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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조차 허락되지 않은, 고독한 방랑자의 절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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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호 08면

1 , 2 ‘겨울나그네’ 음반 커버들.

한 청년이 변심한 연인의 창문에 “잘 자요”라고 써놓고 길을 나선다. 그는 황량한 겨울 길을 걸어가면서 정신과 육체에 닥친 이중의 혹한에 몸을 떤다. 잠시 동안 따뜻했던 날들의 달콤한 추억에 빠졌다가 차가운 현실로 돌아오기도 하고 다음 순간에는 죽음의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의 절망적이고 혼란스러운 영혼은 점차 광기를 띠게 되고, 결국에는 한 떠돌이 악사 노인을 벗삼아 정처없이 머나먼 길을 떠나게 된다.

문소영 기자의 대중문화 속 명화 코드 : 슈베르트 '겨울나그네'와 프리드리히'겨울 풍경'

오스트리아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의 그 유명한 가곡 연작 ‘겨울나그네’(1827)의 내용이다. 솔직히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로서는, 드라마틱한 오페라 아리아가 아닌 독일 가곡은 좀 재미없고 어려운 대상이다. 하지만 아예 들어볼 시도도 하지 않은 다른 독일 가곡들에 비해 ‘겨울나그네’는 자꾸 시도해 보게 되는데, 그것은 사실 음악 자체보다도 그 음반 커버들에 매혹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겨울나그네’ 앨범 커버들(사진 1, 2)에 쓰인 그림들은 모두 동일한 사람-독일 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이 그린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사용한 수많은 ‘겨울나그네’ 음반들 중 겨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겨울나그네’ 앨범 커버에 유독 프리드리히의 그림이 애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리드리히가 슈베르트와 같은 시대, 같은 사조, 가까운 공간에 살았던 게르만 낭만주의 예술가라서? 또는 프리드리히가 겨울 풍경을, 그것도 네덜란드 화가들의 유쾌하고 시끌벅적한 겨울 풍경과는 전혀 다른, 황량하고도 신비로운 겨울 풍경을 많이 그렸기 때문에? 아니면 프리드리히의 그림에 고독한 방랑자가 자주 등장해서?… 아마 이런 이유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 같다.

3 겨울 풍경(1811),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 작, 캔버스에 유채, 33ⅹ46㎝, 국립박물관, 슈버린4 겨울 풍경(1811),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 ,

프리드리히의 겨울 풍경에는 고즈넉한 무덤-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교회 묘지까지-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그림들을 보면, 활기차지만 번잡하고 속된 인간 세상과의 단절감이, 그런 단절이 주는 서글픈 홀가분함과 차가운 안정감이, 그리고 인간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근원적인 고독감이 느껴진다. ‘겨울나그네’의 가사인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1794~1827)가 쓴 시를 보면 주인공 청년은 연인의 배신 때문에 인간세상 전체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또 “차디찬 여인숙”과 같은 무덤에서 안식을 찾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데, 이런 것들이 프리드리히의 그림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게다가 묘지가 나오지 않는 프리드리히의 겨울 풍경 중에는 오히려 더 암담하고 황량한 느낌을 주는 것도 있다. 독일 슈버린에 있는 그의 1811년 작 ‘겨울 풍경’을 보자.(사진 3) 절망같이 컴컴한 하늘, 수의같이 하얀 벌판, 가지가 앙상하고 줄기가 비스듬해서 쓰러지기 직전으로 보이는 고목 두 그루, 그리고 그나마 잘라져 밑동만 남은 다른 나무들… 이 사이에 한 방랑자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이 모든 자연물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이 ‘겨울 풍경’ 속 방랑자에게는 무덤이라는 최소한의 안식처도 보이지 않는다. 죽음이 주는 차가운 안정도 그에게는 사치가 아닐까. 그는 암흑이 드리운 하늘 아래에서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주저앉을 것 같은 다리를 이끌고 끝없는 방랑을 계속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프리드리히의 겨울 풍경 중에서도 이 그림이 가장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겨울나그네’는 절망의 정서가 일관되게 흐르고, 죽음이 아닌 정처없는 방랑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프리드리히의 그림 중 가장 절망적인 느낌의 저 그림은 그의 그림 중 가장 희망적인 느낌의 또 하나의 ‘겨울 풍경’과 짝을 이룬다.(사진 4) 이 두 그림은 같은 해에 비슷한 크기로, 즉 한 쌍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앞서의 그림에는 잘렸거나 쓰러져가는 앙상한 가지의 고목들이 등장하는 반면, 이 그림에는 하얀 눈 속에서 짙푸른 잎을 자랑하며 우뚝 솟은 수려한 전나무가 등장한다. 앞서의 그림에서 하늘은 온통 컴컴하기만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엷은 베일이 드리워진 듯한 공기에 은은히 빛이 퍼진다. 그리고 그 빛에 마치 전나무의 그림자인 듯 드러난 교회의 실루엣이 신비롭고 신성하게 느껴진다.

그림을 잘 보면 전나무 사이에 십자가상이 서 있고 그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방랑자가 이제 희망을 찾은 것일까? 그가 무릎을 꿇지 않고 기대 있는 것을 보니 너무나 지쳤거나 다리가 불편한 듯하다. 하지만 이제 은은한 여명이 그를 축복하듯 감싸고 있고, 눈조차 포근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방랑 끝의 슬픈 안식, 즉 죽음일 수도 있다. 십자가와 교회의 실루엣은 이 방랑자가 죽음의 순간 경험하는 환상일 수도 있다. 그래도 어쨌든 이것은 절망과 고통이 종말에 이르는 한 방식이다. 그래서 ‘겨울나그네’ 음반 중에 이 그림을 커버로 삼은 음반은 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절망의 정서를 끝까지 유지하는 ‘겨울나그네’에는 앞서의 고목이 나오는 겨울 풍경이 훨씬 어울릴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그림들은 이 두 번째 ‘겨울 풍경’처럼 구체적인 그리스도교의 상징들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그림이 사실상 그리스도교적이라기보다는 범신론(pantheism)적이기 때문에, 즉 자연 또는 우주 자체를 신으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 자연은 더없이 신성하고 불가사의하다.

그래서 프리드리히의 겨울 풍경 그림들과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가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프리드리히의 그림 쪽이 좀 더 광범위한 정서와 생각을 지니고 있는 듯싶다. ‘겨울나그네’는 일관되게 절망과 헛된 희망과 고독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지만 프리드리히의 겨울 풍경은 때로는 절망과 희망이 모호하게 교차하며, 또 고독만이 줄 수 있는 사색과 통찰의 기쁨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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