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붙은 계열분리] 문패만 남은 현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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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현대그룹은 최근 ▶정몽헌 현대 아산 회장 계열의 현대건설.상선.증권 ▶정몽구 회장의 자동차 소그룹▶정몽준 고문(국회의원)이 개인 최대주주인 현대중공업으로 나뉘어 별도 회사처럼 움직이고 있다.

법적으론 그룹이라는 틀안에 있지만 최근 현대건설이 자금난을 겪고 있어도 자동차 등 형제 계열사가 자금지원을 고려치 않는 등 내용상으론 이미 쪼개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금감위 고위 관계자는 "현대그룹은 최근 형제 계열사간에 서로 지원하려 들지 않는다" 며 "사실상 계열분리한 상태" 라고 말했다.

현대그룹은 26일 "현대건설이 연말까지 사옥매각 등 자구계획을 통해 1조5천억원을 마련하고 영업활동에서 2천4백89억원을 확보해 차입금 1조8백52억원을 상환할 계획" 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현대는 "신용등급이 낮아지자 현대건설에 대한 금융권의 자금회수가 집중되고 일시적인 자금부족이 우려된다" 고 밝혔다.

현대는 지난 25일 한국기업평가가 현대건설의 신용등급을 낮춘 뒤 차입금을 겨우 막거나 봉급 지급을 미루는 등 자금난을 겪고 있다.

현대는 또 이날 만기가 돌아온 차입금의 연장과 단기금융 지원을 요청했으며 채권단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런 형편이지만 정몽헌 회장은 2주째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고 있다.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이 '현대의 자금난은 자동차의 계열분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 이라며 鄭회장과 면담을 원하고 있지만, 鄭회장은 "이미 퇴진을 선언한 만큼 내가 할 역할이 없다" 며 귀국을 미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서울 청운동 자택에서 기거하며 사옥에 거의 출근하지 않고 있다.

자동차 계열사들은 요즘 그룹 계열사와 거래 관계가 거의 없는 상태다.

현대차는 지난 4월 현대투신의 부실 문제가 불거졌을 때 계열사 중 가장 먼저 '자금 지원 의사가 없다' 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5월 현대건설이 자금난을 겪을 때에도 채권은행에서 현대차가 현대건설에 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거론하자 현대차가 거절했다는 후문이다.

현대차는 최근 금융권의 당좌대월을 거의 쓰지 않는 등 자금사정이 좋은 상태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은 지난 26일 "이제는 현금을 비축해야 한다" 고 말하는 등 그룹 지원 의사가 없다.

지난 3월 형제간 경영권 다툼 이후 상반기로 예정한 계열분리를 앞두고 상호 지급보증이나 지분 정리가 대부분 끝난 상태다. 현재 남은 지분은 鄭 전 명예회장의 현대차 지분 9.1%뿐이다.

현대아산에서 추진 중인 평양체육관 건설에 현대차도 지분을 참여했지만, 이는 형제간 다툼 이전인 3월에 결정돼 계속하는 것일 뿐 추가로 현대의 대북사업에 지원할 의사가 없다는 게 현대차의 입장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건설.상선 등 그룹 계열사와는 영업상 수출 차량을 상선의 배를 이용하는 정도만 남아 있을 뿐 과거와 같은 계열사간 자금 지원 등은 없다" 고 말했다.

이용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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