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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가 한 개 원할 때 두세 개 줘야 학교를 믿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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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눈발이 살포시 날리던 지난해 12월 29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한옥집. 지난해 교육계에 새 바람을 일으킨 여성 교장 3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영숙 덕성여중 교장, 임계화 미림여고 교장, 서형숙 엄마학교 교장이다. 사교육이 만연한 현실에 체념하는 대신 헌신적인 리더십으로 공교육을 살려낸 주역들이다.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동료 교사 설득이 너무 힘들어 교무실 문고리를 부여잡고 엉엉 운 적도 있었다. 과로로 대상포진에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교사의 열정으로 공교육을 바꿀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2009년 이들의 노력이 본지에 보도된 이후 각종 강연 신청이 쏟아졌다. 이들은 “분신이 있었으면 좋았을 정도로 바빴다”면서도 “올해는 더 열심히 뛰겠다”고 다짐했다. 

지난해 12월 29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한옥 카페에 ‘여교장들’(왼쪽부터 임계화·서형숙·김영숙 교장)이 모였다. 이들은 “교육의 희망은 학교 안에 있다”며 “학교가 사느냐 죽느냐는 교장 하기 나름”이라고 입을 모았다.

◆“교사는 온 힘 다해 가르쳐야 한다”=김영숙·임계화 두 교장이 말하는 공교육 살리기 처방은 뜻밖에 단순하다. 바로 교사의 사랑·헌신·사명감이다. 교사가 온 힘을 다해 가르치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교육에 학생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김영숙=평소에 교사들에게 “왜 여러분은 교사가 됐느냐”고 자주 묻는다. 한 사람을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지를 아는 교사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교육은 달라진다. 지금 교사는 최고의 학력 집단이 됐다. 하지만 자격증을 땄다고 ‘누구한테 가르침을 듣느냐’는 식의 고자세를 갖는 건 위험천만이다. 교사는 제자를 스승으로 알고 제자를 어려워해야 한다. 교직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생활을 버리면서 사람을 키워야 하는 숭고한 직업이다. 담임교사가 30분 먼저 교실에 와 있으면 아이들도 지각하지 않는다.

▶임계화=우리 학교(풍덕고)엔 소위 ‘민원(학부모 불만)’이 하나도 없었다. 학부모가 하나를 원하면 두 개, 세 개를 줬기 때문이다. 모든 교직원이 혼연일체가 돼 열정을 바쳤다. 그 바탕은 사랑이다. 아침 조회 시간에 담임교사가 학생들과 눈을 맞추고 수업시간에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격려를 한마디만 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사제 간에 믿음이 생겼다. 지금 학교엔 사랑을 아는 인성을 가진 교사가 필요하다. 교사가 사랑을 실천하면 공교육이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서형숙=우리 아이에게 선생님을 또 다른 부모라고 가르쳤다. 선생님도 엄마의 마음으로 우리 아이를 보살펴줄 것으로 믿고 학교에 맡겼다. 하지만 요즘 엄마들은 교사나 사감 역할을 직접 하려고 한다. 또 교사들은 ‘수업을 어떻게 잘할까’라는 고민을 안 하고 ‘학원에서 다 배웠지?’라며 체념한다. 이 때문에 교육이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

▶김영숙=올해부터 교원 평가를 한다는데 교사들은 자존심 상해한다. 그래서 문항을 들여다보니, 우리가 해오던 일을 잘하고 있느냐고 묻는 수준이었다. ‘수업시간을 잘 지켰느냐’ ‘숙제 잘 내주고 잘 확인했느냐’는 것들이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된다면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되지 (평가를) 의식할 필요가 없지 않나.

▶임계화=외부 평가가 아니라 교사 스스로 신나서 일할 때 교육 효과가 높아진다. 하루 16시간씩 학교에서 일하는 열정적이고 유능한 교사들이 많다. 연수는 제쳐두고 학생들 가르치는 데 몰두하다 승진을 놓치는 교사들도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학생에게 투자하는 교사를 더 인정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교장은 머슴처럼 일해야 한다”=교장은 교사들의 헌신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임 교장은 “교사가 신나게 일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장은 “교장이 먼저 헌신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임계화=교장은 교사를 내 자식처럼 품고 어떻게 교사 개개인이 가진 보석을 빛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교사를 믿고 맡기는 것도 중요하다. “당신이 교장이라고 생각하고 결정하라”며 일을 맡기면 믿어준 만큼 해낸다. 요즘 추진되는 교장 인사권 확대 같은 것은 잘못하면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교사가 교장을 두려워하고 교실이 경직되면 공교육이 잘될 수 없다.

▶김영숙=모범적인 리더가 있으면 아랫사람들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교장은 학교에 관한 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기 위해 뛰어야 하는 머슴이다. 좋은 게 생기면 교사들에게 먼저 줘야 한다. 나는 학벌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교사를 백지 상태부터 봤다. 올해부터 학교 자율화로 교장 권한이 넓어진다. 제도적으로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교장이 먼저 헌신해야 한다.

◆“자녀 앞에서 교사 욕하지 말라”=공교육이 살려면 교사와 함께 학부모도 변해야 한다. 이들은 “학부모가 학교를 믿고 아이들을 맡겨야 공교육이 힘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서형숙=학교가 잘 되려면 학부모와 교사 간 역할 분담이 중요하다. 나는 엄마로서 해야 할 일만 열심히 했다. 엄마 역할은 자녀들이 학교를 잘 다니도록 지켜보는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성적을 잘 받아오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만 쳐다보라고 했다. 숙제는 꼭 하라고 주문했다. 심하게 아이를 때린 교사가 있다고 해도 학부모가 얼마나 이성적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교사가 달라질 수 있다.

▶임계화=엄마이자 교사로서 매년 초 학부모총회 때 학부모에게 세 가지를 당부한다. "자녀를 믿고 충분히 사랑해줘라” "자녀 앞에서 교사를 비난하지 말고 교사 잘못은 교장에게 직접 얘기해 풀어달라” "부모가 생활의 모범이 돼 달라”는 것이다. 학부모가 교사를 믿는다는 것을 자녀가 느껴야 학교 교육이 힘을 받는다.

▶김영숙=학부모들의 (학교에 대한) 신뢰와 교사의 헌신이 만나면 공교육의 톱니바퀴가 멋지게 돌아갈 수 있다. 모든 부모가 내 아이만은 일류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욕심을 앞세우면 (공교육 정상화가) 힘들다. 성적을 잘 받기 위해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들여다봤나. 성적이 부진한 학생들도 일반적으로 인사성이 바르고 청소를 참 잘한다. 공부는 못하지만 다른 영역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모든 이가 더불어 살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

글=이원진·박수련,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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