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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EU헌법 비준의 변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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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951년 프랑스의 장 모네가 독일의 아데나워 총리에게 전쟁 방지 차원에서 양국 중공업을 공동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유럽 통합은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중요한 사안으로 여겨져 왔다. 윈스턴 처칠도 또 다른 전쟁을 막기 위해선 유럽 통합이 이뤄져야 한다고 얘기했다. 결국 어떻게 하면 이런 사상을 지속시키느냐가 유럽의 핵심 과제였던 것이다. 올해 유럽연합(EU) 헌법의 채택을 포함, 통합을 향해 취해져온 여러 정책은 모두 전쟁 없는 유럽을 지향한다.

이로 인해 각국은 전례 없이 자국 이기주의를 버리고 공통의 이익을 추구했다. 각국 정치 지도자들과 외교관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새롭게 조망하는 한편 과거의 편협한 시각이 아닌 새로운 정치적 맥락에서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비에르 솔라나 EU 외교 담당 집행위원은 최근 이에 대해 언급했다. 지난주 EU의 한 안보 관련 회의에서 새 회원국 외교관들에게 미치는 EU의 영향력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옛날 같으면 불가능했을 법한 조화된 사고와 행동이 현실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형태가 형성되고 있다는 의미다. 나아가 솔라나 위원은 발칸반도에서 EU는 평화유지에 그칠 게 아니라 국가적.민족적 비극을 뛰어 넘는 막중한 일을 해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각 나라의 주권과 국가 간 통합을 조화시키는 게 이 같은 노력의 최종 목표다. 새로운 모습의 주권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이로써 EU 회원국들은 완전한 독립 주권국가를 탄생시켰던 356년된 베스트팔렌 조약 체제에서 아직 건설 중인 새로운 시스템으로 나아가게 됐다.

유럽 통합 과정에서 지금까지 이뤄진 진전은 실상 각국이 자신들의 국가 이익을 희생함으로써 이뤄진 면이 적잖다. 올 1월 EU를 25개 회원국으로 확대한 것도 옛 공산국가들을 가입시켜야 한다는 도덕적인 필요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U 확대로 기존 회원국은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자칫하면 EU의 존재마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한편 새 EU 헌법은 각국에서 비준되지 않을 수 있다. 새 헌법은 각국 의회의 결정이나 국민투표로 통과시키도록 돼 있다. 또 모든 회원국에서 비준돼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유럽 각국 정부와 정당들이 새 헌법에 긍정적이어서 의회에서의 처리 방식이 비준에 더 유리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투표의 경우 더 민주적인 의사결정이라는 측면이 있긴 하나 정치적 선동과 정당 이기주의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의회 선거 참여도가 저조한 영국에서는 다른 어느 곳보다 '초강대국 유럽'에 대한 반대 여론이 강하다. 노동당 출신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유로 통화체제 가입 등 유럽통합에 대해 긍정적인 정책을 제시해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새 EU헌법 비준과 관련해선 집권 노동당 자체도 분열돼 있는 실정이다. 블레어 총리가 비준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결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도 국민투표를 실시키로 거의 결정한 상태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사회당의 파비우스 전 총리만 개입하지 않는다면 국민투표에 의한 유럽헌법 비준 가능성이 커 보인다. 유럽 통합을 지지해온 프랑스의 역사적인 전통 때문이다. 그러나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 3명 중 하나로 꼽히는 파비우스 전 총리는 시라크 대통령이 유럽 통합과 관련된 네 가지 주요정책을 수정하지 않는 한 새 헌법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입장은 파비우스가 시라크 대통령의 맞상대라는 이미지를 낳음으로써 그의 당내 위상을 높이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당은 이질적 성향으로 구성된 조직이었음에도 늘 유럽통합을 지지해 왔다. 그런데도 파비우스는 자기 당의 결속을 해쳐가면서까지 시라크에 맞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윌리엄 파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칼럼니스트
정리=남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