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무명예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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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중앙일보 7월 18일자 '삶과 추억' 난에 평생 곁눈질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했던 한학자 고(故)이창섭(李昌燮)씨의 사연이 실린 뒤 한 독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신분을 밝힌 이 독자는 기자에게 한용운(韓龍雲)시인의 시 한구절을 들려줬다.

"…종이라고 하는 것은 치면 소리가 난다. 쳐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세상에서 버린 종이다. 또 거울이란 비추면 그림자가 나타난다. 비추어도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세상에서 내다버린 거울이다…. "

그는 李씨에 대한 기사를 읽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란 '반드시 소리를 내는 종' 이자 '반드시 그림자가 나타나는 거울' 과 같음을 실감했다" 고 말했다.

이어 "보통사람들의 삶이 세상을 향해 더 선명한 종소리를 낼 수 있고, 더 큰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고 밝혔다.

가난 때문에 두 아들을 가슴에 묻었으나 끝내 책을 덮지 않았던 고인의 학문에 대한 신념, 남은 자식들과의 갈등과 화해, 공직생활의 절정기를 맞고도 훌훌 자리를 내던지고 세계일주에 나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 이성(李星)씨의 회한.

李씨처럼 무명이지만 나름대로 삶의 목표를 갖고 묵묵히 실천한 사람들의 생애는 저명인사들의 요란한 삶에선 볼 수 없는 태산 같은 무게가 있음을 절감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간질환자를 사재를 털어 돌본 김구현(金九鉉)씨와 장애인인 부인을 도와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몸바쳤던 정은배(鄭恩培)씨의 기사가 나갔을 때도 독자들의 성원이 잇따랐다.

鄭씨의 부인 황연대(黃年代)씨는 한 시민이 전화를 걸어 "고인이 살아계셨더라면 술이라도 한잔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고 본지에 전해왔다.

"죽음은 가난한 자의 오막살이도 왕후의 궁전도 두드린다" (호라티우스)는 말이 있다.

'무명의 삶' 에 대한 독자들의 이같은 잔잔한 감동에 공감하면서 본지는 앞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삶을 조명하는 데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강민석 기자.독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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