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도시는 살아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베네치아에 오래 있다가 서울에 오면 잠시 이방인이 된 듯하다. 도시와 인간은 서로 교감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도시에서 아름다운 삶이 가능하고 열린 도시에서 열린 삶이 시작될 수 있다. 인간이 도시를 만들지만 인간은 다시 도시에 의해 만들어진다. 세계 도처에 서로 다른 수많은 도시가 있다.

그러나 정작 이들 도시를 물상적으로 분석해보면 대부분 요소가 다 비슷하다. 눈 덮인 도시는 다 한결같고 어둠에 싸인 도시는 불빛으로만 드러난다.

물상적으로는 같은 도시들을 서로 다른 도시가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도시학자들은 그것을 역사와 지리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를 놓고 설명하는 것이지 실체를 알게 하는 것은 아니다.

도시가 다르듯 도시를 만든 인간도 서로 다르다. 그러나 정작 모든 인간은 99.9%가 동일한 유전자로 이루어져 있고 오직 0.1%의 확률로 서로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도시를 서로 다르게 하는 0.1%의 요소는 무엇일까. 20세기의 상징적 도시인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 밸리는 도시구조는 같으나 내용과 형상은 전혀 다른 도시다.

무엇이 이 도시를 이렇듯 다르게 하는가. 기존의 도시이론으로는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 밸리의 같음과 다름의 엄청난 간극을 설명할 수 없다.

현대도시는 지난 반세기 동안 내연기관과 제트엔진의 발달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교통기관의 발달은 도시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고 새로운 네트워크시티의 출현을 이루었으나 한편 생명위협과 자연파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 밸리는 이러한 위기속에 이루어진 20세기의 신도시다. 중세 도시가 '신(神)중심의 도시' 라면 르네상스의 도시는 '인간 중심의 도시' 라 할 수 있는데 비해 라스베이거스와 실리콘 밸리는 인간과 도시가 서로 영향하는 살아있는 유기적 실체의 도시다.

1백년 넘게 뉴욕과 런던이 세계도시인 것은 이들 도시의 두뇌와 심장 역할을 하는 유기적 실체인 세계도시구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과 런던은 예상외로 모든 부분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0.1%에 해당하는 핵심구역의 도시내용에서 두 도시는 자기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월 스트리트와 더 시티, 웨스트 엔드와 타임스 스퀘어는 살아 있는 뉴욕과 런던의 두뇌와 심장인 것이다.

도시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볼 수 있어야 도시의 실체를 알게 된다. 고속철도가 경주로 지나려 할 때 2년여에 걸쳐 옛 경주를 도상에 복원하면서 도시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절실히 느꼈다.

극소수의 유적만 남는 옛 도시를 복원하는 데 기반이 되었던 것이 공룡 복원과 같이 도시를 생명체로 전제하는 일이었다. 지난 5년간 인천국제공항 앞 갯벌과 바다 사이에 해상도시를 구상하면서 내내 생각해온 일도 자연과 함께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바다도시였다.

이제는 도시가 인간 중심만으로는 더 나아갈 수 없다. 인간과 도시가 상생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도시로 현대도시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때다.

지금까지 인류가 건설해온 도시의 반 이상이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다. 21세기에 살아남을 도시는 하나하나가 생명을 가진 소우주일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의 신비를 파헤친 휴먼지놈의 원리가 새로운 도시원리의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 남북한만이 서로 닫힌 것이 아니라 발해만.황해 일대가 다 닫혀 있었다. 이곳은 전 유럽보다 크고 넓은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21세기 도시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으면 동북아시아가 세계중심이 될 것이다.

도시를 유기적 실체로 해석하는 어번지놈의 이론을 기반으로 서해바다에 21세기 동북아시아의 비전을 보일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바다도시를 세계도시구역으로 만들어 이를 경인운하와 한강을 통해 서울 중심에 닿게 할 수 있으면 0.1%의 신도시구역 창출을 통해 서울.인천 수도권이 동북아의 중심도시로 부상케하는 계기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반세기 만의 기회가 지금 우리 앞에 와있다.

김석철 <건축가.베니스대학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