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을 떠났으되, 세상을 바꾼 은자들의 결정적 한마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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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난징(南京)의 옛 무덤에서 발견된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칠현 벽화 모습. 왼쪽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던 혜강, 중간이 그를 아꼈던 완적이다. 이들은 세속을 멀리한 채 한적한 곳에 은거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명(明)을 세운 사람은 승려와 불량배 생활을 하면서 삶의 밑바닥을 전전했던 경력이 있는 주원장(朱元璋)이다. 그는 지방 군벌 세력에 가입한 뒤 뛰어난 무공(武功)과 업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착실히 쌓아간다. 중국 중부지역의 실력자 자리에 오른 그는 주변 세력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힘이 빠진 원(元) 왕조를 쓰러뜨리고 황제 자리에 오를 유력한 인물로 부상한다.

그런 그가 하루는 길을 나섰다. 지금의 안후이(安徽)성 한 지역이다. 그가 찾은 사람은 그 지역에서 실력을 감추고 은둔 생활을 하는 현인(賢人) 주승(朱升). 궁벽한 산골에 은거하고 있는 주승을 만나 주원장이 꺼낸 얘기는 “나는 곧 대권을 차지할 사람이오. 지금 내 입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뭔지 말해 주시오”라는 부탁이었다.
주승은 여러 말을 하지 않았다. 간략한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성을 높이 쌓고, 식량을 널리 모으고, 군왕을 섣불리 칭하지 말라(高築墻, 廣積糧, 緩稱王)”는 내용이다.

주원장은 크게 깨닫는다. 밑바탕의 실력을 우선 튼튼히 하면서 섣불리 명예를 탐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말하자면 더 실력을 쌓아야지 먼저 우쭐거리면서 나대지 말라는 충고였다. 그 당시 상황으로는 그랬을 법하다. 주원장은 주승의 충고를 충실히 따른다. 내실을 다지면서 왕업(王業)을 이룰 기초 닦기에 열중한다. 결국 실력을 쌓은 주원장은 명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주승이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중국 역사서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아니다. 왕조의 신하로 봉직한 일도 없다. 그저 주원장과의 일화로만 유명하다. 직업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산간벽지에 사는 은자(隱者)다. 어떻게 배움을 이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모두 아홉 글자로 이뤄진 그의 충고는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그의 지혜에 힘입은 주원장은 결국 왕조 권력을 손에 거머쥐는 최고의 실력자 자리에 오른다.

중국에는 세속에 등을 돌린 채 ‘나 홀로’의 삶을 유지했던 은자의 전통이 강하다. 역사물이나 야사(野史)류 등에 등장하는 은자는 흔히 ‘지혜의 대명사’쯤으로 대우받는다. 그 은자의 삶이 사회 전체를 풍미했던 시절이 있다.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다. 그때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다. 대나무 우거진 숲 속에서 저잣거리의 먼지(紅塵)를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다.

온갖 계략과 눈속임이 횡행했던 당대의 정치판을 혐오했고, 거짓과 위선으로 제 부(富)를 쌓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속물(俗物) 취급하며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실제 생활에 별로 소용이 닿지 않는 고담준론(高談峻論)에 빠지기 일쑤고, 거문고와 술, 낭만과 자유로움에 탐닉했던 이들 죽림칠현의 선비들이 남긴 일화는 유명하다.

그중에 완적(阮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유명한 선비로서 역시 세속의 가치를 멀리한 채 청담(淸淡)을 즐기고 거짓과 술수를 부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했던 인물이다. 그는 눈짓으로 사람을 대하는 데 능했다.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듣고 세속의 명리(名利)만을 좇기에 바쁜 혜희(<5D47>喜)라는 인물이 찾아왔다. 조문을 위해서다. 그러나 완적은 그 사람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번지르르한 말로 혜희가 조문을 하지만 완적은 흰자위가 크게 드러나는 눈으로 혜희를 흘기기만 할 뿐이었다.

이어 혜희의 동생인 혜강이 찾아왔다. 혜강은 형 혜희와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인물이다. 명리를 혐오했고, 권력자를 찾아다니면서 아부나 하는 사람을 증오했다. 역시 죽림칠현의 대표적인 선비였다. 그를 바라보는 완적의 눈길은 혜희를 바라보던 그 눈이 아니었다. 애정이 듬뿍 담긴 그윽한 눈길로 혜강을 바라보는 완적의 눈. 흰자위는 전혀 보이지 않고 동공의 크기가 아주 확대된 눈이다. 상반된 눈길로 혜희와 혜강을 바라본 완적의 고사는 이렇게 남는다.

혜희를 보던 눈길은 백안(白眼), 이를테면 싫거나 혐오스러운 대상을 볼 때 저도 모르게 검은색 동공이 작아지면서 흰 눈자위가 드러나는 눈이다. 오늘날에도 ‘누구를 백안시하다’의 그 백안이다. 그에 비해 혜강을 바라보던 완적의 눈은 청안(靑眼)이다. 좋아하는 대상을 볼 때 동공이 확대되면서 그윽하게 바라보는 눈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고서 들여다볼 때의 눈길이다.

완적만 그런 게 아니다. 그가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본 인물인 혜강도 온갖 기벽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숲 속의 대장장이’였다. 한적한 그의 집 앞에서는 늘 쇠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이런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찾아와 쇠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주저 없이 나서 쇠를 두드렸다. 힘든 노동일을 한다고 그의 학식이 가벼웠던 것은 아니다. 그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을 깊이 체득했던 고결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속의 권력자가 찾아오면 그는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당대의 권력자였던 종회(鍾會)가 찾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명사(名士)를 이끌고 와서 혜강의 고견을 듣고자 했던 종회는 혜강이 눈길 한 번 주지 않자 결국 마음속으로 깊은 분노를 품고 돌아간다. 종회는 결국 혜강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다. 이 기세 좋은 선비 혜강은 마침내 형장의 죄인으로 일생을 마감한다.

이들 은자는 중국인 정신세계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다. 은자의 전통은 위진남북조의 죽림칠현을 통해 크게 높아지지만 중국 역사의 어느 장면에서나 잘 등장한다. 주승이나, 그 앞에 살았던 완적과 혜강 등 죽림칠현. 숨어 지내는 사람들인 이들 은자에게 중국인들은 왜 주목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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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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