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밀실’선 예산 심의 않도록 법 고쳐놓고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22일 오전 지식경제부 예산 담당 공무원은 국회 본관 2층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실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민주당이 예결위 회의장을 점거하는 바람에 예산안조정소위(옛 계수조정소위) 위원으로 내정된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곳에서 예산안 심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원들이 “설명 좀 듣자”고 해 달려간 이 공무원은 말 한마디도 못한 채 감액사업에 대한 반박자료만 회의장에 집어넣고 되돌아 나왔다. “공식적으로 소위가 열린 게 아니어서 부처 공무원을 배석시킬 수 없다”(한나라당 김광림 간사)고 해서다.

국회 파행으로 예산 심의가 밀실(密室)에서 이뤄지고 있다. 한나라당은 국회 정책위의장실에서, 민주당은 점거 중인 예결위 회의장에서 제각각 ‘약식 소위’를 열어 예산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비공식 논의 절차라는 이유로 기자들은 물론 소관 부처 공무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 직원도 출입을 막고 있다.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획재정부 예산실의 담당 과장들만 참석할 뿐이다. 재정부 직원들은 여야의 두 회의장을 왔다 갔다 하느라 더 분주해졌고, 소위 회의장에서 마지막 호소를 해야 할 부처 장·차관들은 소위 위원들과 개별 면담 일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조차 23일 “여당과 야당이 계수소위를 따로 운영하는 진풍경이 벌어져 송구하다”고 말할 정도다. 한나라당은 상임위에서 순삭감한 6000여억원 외에 22일까지 4000억원을 추가 삭감했다. 하지만 어떤 사업을 얼마나 삭감했는지 아는 사람은 ‘밀실 안 사람들’뿐이다. 민주당도 감액 심사를 마쳤지만 총감액 규모는 아직 공개하지 않았다.

여야가 따로따로, 그것도 문을 걸어 잠그고 하는 밀실 계수조정을 보는 눈이 고울 리 없다. 예결위 관계자는 “지역구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등 의원들이 챙길 게 많은 증액사업 심사 때가 되면 예산 나눠 먹기를 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경우에 따라선 291조8000억원에 달하는 예산안 조정 작업이 속기록 한 장 남기지 않고 마무리될지도 모를 일이다.

예산안조정소위는 2000년 처음 공개됐다. 밀실에서 ‘나눠 먹기’ 식 예산 배정을 한다는 비판이 고조되자 소위 회의를 공개하도록 국회법을 고쳤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국회의 예산 심사가 투명해졌다는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올겨울, 4대 강 예산을 둘러싼 여야 대립으로 국회 시곗바늘은 9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선승혜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