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비틀어야 제맛, 그거 빼면 뭔 재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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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택씨는 “기존 얼간이들이 ‘네 옳습니다’ 할 때 ‘그건 아니죠’ 손 저으며 나서는 게 예술가”라며 “생을 다할 때까지 나 스스로 즐겁기 위해 계속 행진, 행진할 것”이라고 했다. [사진가 이한구 제공]

백남준아트센터(관장 이영철)가 올해 만든 ‘백남준 국제예술상’ 첫 수상자로 이승택(77)씨가 뽑혔다. 미술계에서 ‘영원한 이단아’ ‘저항으로 일관해 온 비조각(非彫刻) 의 야당인’으로 불리는 그를 만났다. 수상 기념전은 내년 2월 28일까지 경기도 용인시 상갈동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세상과 타협하길 거부하는 선생 작품의 근본은 무엇일까요.

“미술의 역사를 보면 위대한 작가는 전부 앞 세대가 일군 성과를 뒤엎습니다. 대가의 업적은 그대로 남긴 채 새 세대는 새롭게 시작합니다. 일종의 부정(否定) 전략이랄까요. 대부분 한국 작가들이 외국에서 유행하는 사조나 방법에 ‘와’ 하고 몰려가지만 난 거기에 휩쓸리지 않았어요. 차라리 뒤 돌아섰죠. 부화뇌동하는 자들과 반대편에 서서 조용히 바라보면 훨씬 더 내게 득이 되더란 말입니다. 내 사전에 재탕이란 없습니다. 제가 후배들에게 늘 말하죠. ‘작가는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작품이 항상 바뀌어야 하는데 대부분이 미술시장에서 잘 팔리는 히트 상품이 나오면 그걸 평생 베껴먹고 산다. 역량이 부족해 변화하지 못하면 죽은 작가다.’”

-매 순간 변하려면 얼마나 긴장하고 살아야 할까요. 그 에너지가 부럽습니다.

“‘새로운 걸 보여 주겠다’는 마음보다 내가 좋아서 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겁니다. 난 즐거움을 찾아 헤맸다고 말할 수 있어요. 현대예술은 고도의 지적인 놀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어요. 역사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욕심도 있었습니다. ‘세상은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집념으로 묵묵히 일해 왔습니다.“

-젊은 후배들 작품은 가끔 보러 다니십니까.

“다들 그럴듯하지만 서구미술 어디엔가 있는 거거든요. 자기만의 목소리가 없어요. 작가가 독자적인 세계를 가져야지, 젊은 애들이 왜 그럴까 싶어요.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들이 어디엔가 옴짝달싹 못하게 묶여 있지 않나 싶어요. 말하자면 ‘치사’한 게 작품에 보인다고나 할까.”

- 그들을 치사하게 만든 원인이 뭘까요.

“서투른 지도자라 할 수 있겠지요. 세련되고 깨끗한 것만 찾는 관람객, 그런 걸 자꾸 팔아야 하는 화랑 주인들, 거기에 한 통속이 돼 ‘그런 것이 미술이다’라고 오도해버리는 대학교수들과 평론가, 이 모두가 서투르기 그지없는 작가들의 지도자란 말입니다.”

-한국 현대미술이 그런 지도자들 때문에 망했다는 말씀이군요.

“1945년 해방이 되고 50년에 6·25가 터지니 그런 극심한 혼란기에 날뛰며 잘 나가는 건 사기꾼들이더군. 그렇게 사기를 치다가 70년대 들어 모방의 시대가 오니 누가 먼저 베끼느냐 난리들이었죠. 인터넷이 발달하고 미술정보를 누구나 볼 수 있게 되니 그 동안 남에 걸 제 것처럼 해온 게 들통이 나게 생겼거든. 그 가짜를 진짜로 만들려니 집단 이기주의가 필요했겠죠. 그게 ‘코드 사회’인 겁니다.”

-시상식장에서 수상 소감 대신 자작시를 낭송하셨는데 작업하는 마음, 생의 태도를 응축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재료 선택도 상상을 초월하는데요. 이를테면 바람·연기·불·물·안개 등 비물질적인 것도 많고요.

“예술은 비틀어야 의미가 있죠. 그것 아니면 뭔 재미가 있겠어요. 실험과 도전에 필요하다면 귀신이라도 좋았겠죠. 작품이 될 수 없는 것에 더 관심이 갔어요. 정상보다 비정상, 탈 관념, 반 예술의 자유를 즐겼죠. 엽기적이고 불쾌한 것, 추한 것, 성적 도발성이 강한 것 등이 나를 긴장시키고 신선한 감동을 줬기에 내가 뭔가 해야겠다 싶으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고 그래서 더 힘들게 살았어요. 후회는 없지만.”

정재숙 기자

◆이승택=1932년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났다. 59년 홍익대 조각과를 졸업하고 50년을 전업작가로 살았다. ‘한강에 떠내려가는 불붙은 그림’ ‘바람놀이’ ‘20일간의 분신행위 예술’ 등 실험작업으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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