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의사의 고언] 응급실은 지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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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온 의료인들이 지금 가장 과격한 방법으로 국민과 정부를 향해 자기들의 의사를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우리나라 1백20년 현대 의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며 세계적으로도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의료인의 전면 파업이란 전 국민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이를 피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한탄스러운 일이다.

왜 의료인들이 이러한 이례적인 행동을 하는가. 일반적으로 의약분업 제도가 약사에게 유리하게 돼 있어 의사들이 여기에 불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의약분업은 단지 도화선일 뿐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의료계는 그간 의료보험 수가제도, 정부의 지나친 간섭과 규제, 저질 의사의 양산(量産)으로 이어지는 의과대학 신설 등 일련의 정부 의료정책에 대해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왔고 또한 불만과 울분들이 쌓여 오다 이번 의약분업을 계기로 폭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의사들은 의?전문성의 가치를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 의료보험 제도로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왔다.

의자에 앉다 못에 찔렸을 때 바지를 꿰매는 값은 몇만원인데 찔린 상처를 꿰매 주는 데는 몇천원이라는 일화로 대변되는, 종종 원가도 보상받지 못하는 저렴한 의료수가, 전문 의료행위에 대한 의료보험자의 지나친 간섭, 양심적이고 교과서적인 의료행위를 할 수 없게 하는 보편적인 의료의 왜곡 현상 등에 대한 고민 속에서 일해 왔다.

의약분업 준비과정에서 의료기관의 재정적인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약가 실거래가의 갑작스러운 적용은 병.의원 수입의 격감을 초래하게 돼 의료계가 뭉쳐 파업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여기에 정부의 고압적인 통제와 간섭, 전문성이 경시된 획일적인 의료제도, 우선 순위에서 항상 뒤지는 의료문제, 그리고 국제적으로 낙후한 각종 보건의료 지표 등은 정부에 대한 불만을 쌓이게 하고 신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의료계는 이러한 여러 문제에 대해 수없이 건의했지만 정부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고 단지 의료계의 단순한 불만으로 치부해 온 결과가 이번에 이러한 사태로 나타나게 됐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부가 약사법의 몇몇 구절을 개정함으로써 오랫동안 쌓여 온 의료계의 상처와 불만을 해소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정부는 그동안 의료계에 적용해 온 여러 잘못된 관행에 대해 깊은 반성의 표시를 하고 실질적인 개선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이번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의료계가 이같은 과격한 방법으로 의사표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응급실에서마저 철수한다는 것은 아무리 의료계에 동정적인 사람들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인도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국민.정부, 그리고 의료계 삼자가 모두 패배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남북 회담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승리하는 현명한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극단적인 방법에는 절대 해답이 없다.

의료계는 이 이상 무엇을 더 얻을 것이 남아 있는가. 의료계는 이미 많은 것을 얻었고 또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의료인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사회에 부각시키는 데, 그간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의료 문제를 사회 중심 문제로 만들고 이를 국민에게 알리는 데 크게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고압적이던 보건복지부가 이번 사태로 변했음을 장관의 언동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고 당.국회, 그리고 국무총리에 이르기까지 의료문제를 그 전처럼 가볍게 다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데도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의료계가 응급실마저 버리고 떠난다면 이러한 모든 성공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의료계가 이번 사태에서 명예스럽게 물러설 길은 크게 열려 있다. 환자의 곁으로 돌아간다는 것만큼 명예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김일순 <연세대 의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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