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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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본을 대표하는 한반도 연구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일본 도쿄(東京)대 명예교수가한국정치학회 주최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그는 23일 인터뷰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는 사흘동안 텔레비젼을 떠날 수 없었다”며 “김정일(金正日)북한 국방위원장은 국제사회를 향해 개방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정상회담을 평가했다.

- 오랫동안 북한 현대사를 연구해 왔고 북한을 방문한 적도 있어 이번 회담을 지켜본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회담은 시작부터 놀람의 연속이었다. 金위원장이 갑작스레 회담에 응한 사실부터가 그렇다. 나는 오래전부터 북한을 '유격대 국가' 로 규정해 왔다. 혁명정신으로 무장한 군이 체제의 중심인 나라라는 의미에서다. 목소리조차 노출되는 것을 꺼려왔던 지도자가 국제무대를 향해 나선 것 자체가 놀랄 만한 것이었다.

또 북한은 1990년대 초반 핵위기 이후 줄곧 미국과 관계개선을 시도해 왔다. 최근엔 일본을 포함, 서방 여러나라와 국교수립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남북 대화는 마지막 단계에서나 이뤄질 것으로 보았다. 그런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 실제 회담과정에 나타난 金위원장의 모습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많았는데.

"물론이다. 일본에서도 金위원장을 매력적인 지도자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는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하는데 성공했다. 회담 첫날 공항에서의 악수와 마지막날의 포옹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남북 양정상이 공동발표문에 합의.서명한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에 앞서 신뢰관계가 만들어졌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7.4 남북 공동성명 등). 신뢰관계에 바탕을 두지 않은 합의문은 실천되지 않았고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회담은 남북관계에 결정적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 이번 회담에서 보여준 북한의 전향적 자세를 보고 본격 개방을 점치는 사람이 많다.

"북한은 한계상황에 이른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개방의 길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아마 중국이 걸었던 것과 같은 길을 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속도다. 고르바초프 식의 급격한 개혁.개방은 체제붕괴로 연결될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회담을 金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의 변화이며 국제사회를 향한 개방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북한 체제 전체의 개방이라고 평가하기엔 아직 이르다. 마치 건물은 그대로 두고 간판을 바꿔 단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 관심은 金위원장이 북한 국민을 향해서도 개방과 변화의 자세를 보일까 하는 점이다. 이는 金위원장이 신의 위치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는 '인간선언' 이 될 것이다. 그는 이같은 점들을 염두에 두고 속도를 조절해 나갈 것이다. 훌륭한 연출가는 관객의 반응을 보면서 작품을 만들어 가는 법이다."

-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관계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북한은 미국과는 관계를 개선할 것이고 중국.러시아와는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남북한은 북.일 수교회담에서 제기될 과거사 사죄와 배상문제에 공동보조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일본에 대북 경제원조를 확대하라고 압력을 행사할 것이다. 이럴 경우 일본의 운신의 폭은 매우 좁아질 것이다."

예영준 기자

<와다 하루키는…>

와다 하루키는 1960년대부터 한국현대사와 러시아 혁명사를 연구해온 진보적 학자로 명망이 높다.

강단에만 머물지 않고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80년대 초반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金大中)구명운동 등에 참여한 실천적 지식인으로도 알려졌다.

그의 저서 '한국전쟁'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는 실증적인 연구로 인해 북한 연구 서적.논문에 자주 인용된다.

38년 오사카(大阪)생, 도쿄(東京)대 서양사학과 졸,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역임. 98년부터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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