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칸나에 전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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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농민층이 중심이 된 초기의 로마군은 빈부차에 따라 다섯 계급으로 나뉘었다.

무기도 자기 손으로 마련해야 했다. 가장 부유한 가정 출신인 제1계급은 창 2개와 장검.단검.청동투구.갑옷.방패로 무장했다.

제2계급에서는 이중 방패가 제외됐고 제3, 제4계급은 투구.갑옷.방패를 지니지 않았다. 제일 가난한 제5계급은 돌과 곤봉만으로 무장했다.

로마는 주변세력과 숱하게 전투를 하면서 군대 내의 빈부차가 전투력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제(兵制)를 바꿔 무장비용을 국가가 부담했고, 병사들에게는 보수를 지급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빈부차 아닌 전투경험을 기준으로 무기를 지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로마는 공직에 나서려면 10년 이상의 군경력이 필요할 정도로 군을 소중히 대접했다.

로마군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시민군으로 막강했지만, 지중해 진출을 노리면서 숙적 카르타고에 적지 않은 패배도 맛보았다.

이중 기원전 216년 8월 2일 이탈리아 남부 칸나에에서 벌어진 전투가 가장 치욕적이었다.

7만명의 로마군은 명장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 5만명에게 포위당한 뒤에도 용감히 싸웠지만 6만명 가까이 전사했다.

전사자에는 수많은 귀족자제들도 포함됐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장병은 4천여명에 불과했고, 그 중에는 뒷날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오도 끼어 있었다.

8천여명이 포로로 잡혀 그리스 각지에 노예로 팔려나갔다.

제2차 포에니전쟁(기원전 218~202년)은 칸나에 전투 같은 패배도 있었지만 결국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자 마케도니아의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가 마케도니아를 물리쳐 달라고 원조를 요청해 왔다.

기원전 196년, 플라미니누스를 총사령관으로 한 로마군과 그리스군이 연합해 마케도니아군과 맞붙었다.

결과는 연합군측의 대승리였다. 전투가 끝난 후 플라미니누스는 "칸나에 전투 때 노예로 팔려간 로마군 병사들을 찾아달라" 고 그리스에 요구했다.

그리스는 전국을 뒤져 살아남은 병사 1천2백명을 찾아냈고, 자비로 몸값을 부담해 로마에 귀환시켜 주었다.

로마는 자국군 포로를 20년 동안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이 6.25 발발 50주년이다. 이 나라를 누가 어떻게 지키고 가꾸어 왔는지 되새겨 볼 때다.

"법적으로 국군포로는 없다" 는 오해받기 알맞은 소리나 하는 장관도 있지만 대다수 국민은 나라와 군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무(武)' 는 '지과위무(止戈爲武)' 라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풀이대로 '전쟁을 막는' 막중한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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