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쏟아지는 금융대책…약효 의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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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중견.중소기업들의 자금난 해법을 놓고 정부가 허둥대는 모습이다. 문제를 가볍게 보다 그게 아니다 싶어 하루가 멀다 하고 대책을 내놓고 있으나 앞뒤가 안맞거나 설익은 것들이 많다.

정부의 자금시장 안정대책의 골자는 시중 자금이 은행.보험에서 돈이 마른 투신권으로 흘러가게 하자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달 중 은행.투신 등의 부실을 낱낱이 공개하고, 종금사에도 자금을 지원해 시장의 불안요인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시장에선 내로라 하는 중견기업들의 부도설이 계속 흘러다니고 있는 만큼 정부도 몸이 달 만큼 달았다. 지난 주말부터 사흘간 연이어 대책을 내놓은 것에서 그런 조바심이 읽혀진다.

그러나 정부가 애쓰는 만큼 대책의 '약발' 에 대해 금융계는 회의적이다. 은행.투신 등에 신상품을 허용해 주거나 금융기관의 등을 떼밀어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을 반강제로 인수시키는 등의 조치는 대증요법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번 자금난을 보는 정부와 시장의 시각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부는 현재 자금난이 기업의 부실 등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금시장의 위축에 따른 '일시적' 현상으로 보고 있다.

이에 반해 시장관계자들은 원칙없는 구조조정으로 정부가 시장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잠복했던 불안이 현실화하면서 자금경색이 심해졌다고 분석한다.

김진영 삼성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은 "시중에 돈이 넘치면서도 돌지 않는 것은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 때문" 이라며 "예컨대 지난해 대우 경우와 같이 10조원의 채권투자펀드가 부실해질 경우 정부가 다시 발뺌할 것이란 게 금융기관들의 인식" 이라고 지적했다.

◇ 돈 풀고 끌어들기기에 급급, 원칙도 무시〓우선 은행.보험 등 돈이 풍부한 곳의 자금을 푼다는게 정부 대책의 출발점. 은행.보험사 등을 통해 10조원 규모의 채권투자펀드를 이르면 이번주 중 조성해 중견기업의 회사채를 사들이도록 했다.

금융권의 반발을 우려해 지난해 조성했던 채권안정기금과 달리 금융기관 자율로 운용토록 한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책 중 금융권의 반발이 가장 큰 부분으로 꼽힌다. S은행 부행장은 "채권투자펀드는 부실화하면 곧장 은행 손실로 이어지는데 정부가 무슨 권한으로 이를 강제하는지 모르겠다" 며 "잠재부실까지 공개해 은행을 클린화하라면서 다른 한편으론 정부가 부실을 부추기는 것은 모순" 이라고 지적했다.

H은행 자금부장은 "우량은행일수록 돈을 더 많이 내라고 하면 다같이 부실은행으로 하향 평준화하자는 얘기" 라고 말했다.

정부는 돈을 끌어들이기 위한 조치도 함께 내놨다. 은행에 3개월짜리 신탁상품을 허용하고 투신권에는 개인연금신탁.퇴직신탁을 전면 허용한다. 투신권엔 이밖에 특정기업 주식을 50% 이상 사들일 수 있는 주식형 사모펀드를 허용해 줬다.

주식형 사모펀드는 특정기업 주식 매집을 통한 시세조작 등 여러 부작용을 우려해 금융감독원은 최근까지도 절대 불허 방침을 누차 밝힌 바 있다.

단기신탁은 은행권의 오랜 바람이긴 했지만 연말까지 한시적인 데다 CP.회사채에 50% 이상을 투자하도록 못박아 실효성이 의문시된다.

기업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문제기업의 회사채.CP를 인수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투신의 퇴직신탁은 기업주들이 원금손실을 보전토록 해 사실상 원금보전 상품으로 만든다는 방침이다. 이 역시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데다 투신권의 실적배당 원칙에도 어긋난다.

◇ 시장 불안요인 제거〓기업 자금난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던 종금사들에 유동성 지원 등을 통해 추가 퇴출을 막기로 했다.

또 투신.은행의 잠재부실을 각각 20일, 30일 낱낱이 공개하는 부실 청소 등 대응방안을 마련키로 했다. 은행은 부실채권 정리에 따른 국제결제은행(BIS)비율 하락 방지책을 마련하고 투신은 펀드 클린화 후 추가로 자본확충 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중견기업들의 신용도를 이달 중 직접 점검, 우량기업은 개별 보증을 통해 자금난을 덜어주기로 했다. 대신 신용도가 떨어지는 기업은 유사한 곳끼리 묶어 채권을 발행한 뒤 정부보증 등을 통해 신용도를 높여 시장에서 소화가 가능하도록 할 방침이다.

◇ 시장 신뢰회복 미지수〓정부가 리더십을 잃고 시장에 끌려다녀서는 대책도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송치영 국민대 교수는 "이번 대책은 시장상황이 워낙 급박한 만큼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며 그러나 "채권펀드조성 등은 또다른 관치금융이란 점에서 너무 몰아붙이면 금융부실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고 지적했다.

D투신 관계자는 "한계기업.금융기관을 모두 안고 가려다 보니 20일에 한번씩 자금시장 안정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시장에 미치는 효과는 별로 없다" 며 "퇴출 절차와 원칙을 명확히 해야 무리수를 두지 않고 공적자금 투입도 줄일 수 있다" 고 말했다.

김광기.이정재.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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