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다부동 전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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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50년 7월 초 한국전쟁 긴급 투입명령을 받고 미 캠프 펜들턴 기지를 출발하는 해병대원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냉소적이었다.

그들은 한국전쟁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고, 미 해병의 전통적 용맹성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들은 또 세 가지를 믿고 있었다.

상륙일이 외출일이며, 봉급을 앞당겨 받을 수 있는 날이기도 하고, 전투를 하게되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죽거나 부상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8월 초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을 때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북한군은 계속된 승전에 사기가 충천한 데다 '8월 15일까지 대구를 함락하라' 는 김일성(金日成)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한국군과 미군은 크게 위축돼 있었던 것이다.

이때 투입된 미 해병대는 아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별명 그대로 한반도의 불을 끄는 '소방대' 의 역할이었다.

낙동강을 사수하겠다는 결의가 북한군의 파상적 공세와 맞부딪치다 보니 살육의 혈전이 되풀이됐다. 그 중에서도 8월 18일부터 6일간의 '다부동(多富洞)전투' 가 대표적이었다.

미군 전사(戰史)에서도 이를 '한국전 최악의 전투' 로 기록하고 있다.

정일권(丁一權)의 '6.25 비록' 에는 당시의 처절했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백선엽(白善燁)사단장 등 장교들은 사병들 앞에서 '생일은 달라도 죽는 날은 함께 하자' 고 맹세했고, '내가 물러서면 나를 사살하라. 너희들이 물러서면 내가 사살하겠다' 고 공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더욱 웃지 못할 일은 밤낮으로 혼전이 계속되다보니 적군과 아군을 구별할 수조차 없어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병력을 점검하다 보면 북한군 여러 명이 섞여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전사했는지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정부는 지난 81년 다부동에 전적비를 세워 주력부대였던 국군 제1사단 전몰장병의 넋을 기렸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낙동강 유역 격전지의 전몰장병 유해 1백여구가 2개월 남짓의 작업 끝에 수습돼 지난 주말 영결식을 치르고 곧 국립묘지에 안장되리라 한다.

성공리에 끝난 남북 정상회담과 때를 맞춰 더욱 의미가 크다. 남북분단과 동족상잔 비극의 희생물로 바쳐져 반세기 동안 편안히 잠들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던 그들의 영혼이 이젠 통일의 실현을 기다리며 미소를 보내고 있지는 않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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